우리 나라 사람들이 흑인을 주변에서 흔히 보게 된 것은 한국 전쟁에 미국이 참전하면서부터다. 19세기 말에 조선에 온 미국의 군함과 상선에도 흑인이 타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태조 3년(1395) 7월 5일 「태조 실록」은 조선에 온 최초의 흑인을 소개하고 있다.


섬라국(오늘의 태국) 사신 장사도가 조선에 왔다. 장사도가 말했다.

 
“작년 12월에 회례사 배후와 함께 일본에 이르렀다가, 도적에게 겁탈당해 예물과 행장이 모두 타 버렸습니다. 다시 배 한 척을 꾸며 주시면 올 겨울을 기다려서 본국에 돌아가겠습니다.”

 
왕이 그를 앞으로 나오라고 하자, 그는 왕에게 칼과 갑옷과 구리 그릇과 흑인 두 사람을 바쳤다.


한편 전쟁에 참가한 흑인도 있었다. 선조 31년(1598) 5월 26일 왕은 임진 왜란에 참전한 명나라 군사들을 위로하기 위해 명나라의 장수 팽신고의 처소를 방문해 술자리를 베풀었다. 팽신고는 명나라 권문 세가의 자식인데 평소 탐욕스럽기로 악명 높았다. 조선에 구원군 장수로 왔는데도 한편으로는 철 무역을 하기도 했다. 이 자리에서 팽신고는 자신의 군대에 얼굴 모습이 다른 신병(神兵)이 있다면서 왕에게 보게 했다. 그 신병은 파랑국(포르투갈) 사람이며, 파랑국은 바다 셋을 건너야 있는데 조선과의 거리는 15만 리 정도 된다는 것이다.


선조는 먼 나라에서 온 신병을 보게 되어 감격했다. 사관은 신병의 모습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름은 해귀(海鬼)다. 노란 눈동자에 얼굴빛은 검고 사지와 온몸도 모두 검다. 턱수염과 머리카락은 곱슬이고 검은 양모처럼 짧게 꼬부라졌다. 이마는 대머리로 벗겨졌는데 한 필이나 되는 누런 비단을 반도(전설 속의 복숭아)의 모습처럼 둘러감아 머리 위에 올려놓았다. 바다 밑에 잠수해 적선을 공격할 수 있고, 또 며칠 동안 물 속에 있으면서 물고기를 잡아먹을 수 있다. 중국 사람도 이 신병을 보기가 쉽지 않다.

 
팽소신이 신병을 자랑하자 왕은 감격해 하며 치사했다. 파랑국의 얘기는 『조선 왕조 실록』 전체에 걸쳐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

<노회찬과 함께 읽는 조선왕조실록, 도서출판 일빛,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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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18 23:20 2009/10/18 2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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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 이방원은 12명의 부인에게서 모두 12남 17녀의 자식을 얻었다. 다행히 정실인 원경 왕후에게서 4남 4녀의 소생을 얻었기에 일찍이 장남인 양녕 대군을 태자로 책봉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양녕 대군은 사냥과 풍류에 탐닉하는가 하면 기이한 행동을 일삼아 세자 자격을 박탈당하고 만다.

 
양녕의 이러한 행동에 관한 배경에는 몇 가지 설이 전해 오고 있다. 그것은 첫째, 양녕은 아버지인 태종 이방원이 형제를 셋이나 죽이고 왕위에 오르는 것을 보고 애초부터 왕세자가 되고 싶지 않았다는 것이다. 둘째, 태종의 마음이 셋째 아들인 충녕 대군에게 있음을 간파하고 왕세자 자리에서 물러나기 위해 일부러 기이한 행동을 일삼았다는 것이다.

 
여하튼 양녕이 도를 넘는 광기를 보인 것은 사실이다. 자신의 선생을 처음 맞이하던 날 스승 앞에서 개 짖는 시늉을 낸 것은 수많은 기행 가운데 하나의 예일 뿐이다. 양녕이 미친 것처럼 행동한 배경을 정확히 설명할 자료는 없다. 그러나 태종이 처음부터 충녕 대군에게 마음이 있었다는 설명은 사실이 아니다. 「세종 실록」 총서에 따르면 1418년 태종이 양녕 대군을 왕세자 자리에서 폐하면서 양녕의 맏아들에게 왕세자 자리를 계승하려고 했다. 정실에서 태어난 장남이 아니면서 왕위에 오른 다른 왕들처럼, 우여 곡절 끝에 왕위에 오른 태종은 뒷날의 시비를 예방하고 왕실을 강화하기 위해 장남이 아니라면 장손을 후계자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자 여러 신하들이 나서서 반대했다.

 
“이제 어린 손자를 세운다면 어찌 앞날의 무사함을 보장하오리까. 하물며 아버지를 폐하고 아들을 세움이 의리에 어떠하올지. 청컨대 아드님 가운데 어진 이를 골라서 세우시기를 바라옵니다.”

 
그러자 태종이 말했다.

 
“그러면 경들이 마땅히 어진 이를 가리어 아뢰라.”

 
여러 신하들이 함께 아뢰었다.

 
“아들이나 신하를 아는 데 아버지나 임금과 같은 이가 없사오니, 가리는 것이 성심에 달렸사옵니다.”

 
노련하고 현명한 신하들이었다. 특정 왕자를 잘못 지목했다가 닥칠지도 모르는 위험을 피한 것이다. 당신 아들은 당신이 잘 아니까 직접 고르라는 말이었다.

 
태종은 결국 신하들의 말을 좇아 양녕의 장남을 포기하고 셋째 아들 충녕을 왕세자로 책봉했다. 태종이 자신의 뜻을 굽히고 신하들의 말을 따를 만큼, 충녕은 어려서부터 성실하고 영특해 여러 왕자들 가운데서도 돋보이는 존재였다.


<노회찬과 함께 읽는 조선왕조실록, 도서출판 일빛,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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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18 22:50 2009/10/18 2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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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 왜란이 시작되어 왜군이 부산에 상륙한 이튿날인 1592년 4월 14일. 부산을 방어하던 두 명의 장수가 이 전쟁에서 처음으로 전사했다. 바로 부산 첨사(종3품 무관) 정발과 동래 부사 송상현이었다. 『조선 왕조 실록』은 이 두 명의 장수에 대한 자세한 기록을 전하고 있다.

 
부산포의 수비 대장 정발 장군은 이 전쟁에서 전사한 최초의 장수였다. 그는 4월 13일 부산 앞바다 절영도에서 사냥을 하다가, 바다를 뒤덮은 왜선들을 보고 조공하러 오는 왜라 여기고 대비하지 않았다. 나중에 황급히 성으로 돌아온 정발 장군은 사력을 다해 성을 방어했다. 그러나 14일 새벽에 적이 성을 백 겹으로 에워싸고 서쪽 성밖의 높은 곳에 올라가 포를 비오듯 쏘아 대었다. 정발이 서문을 지키면서 한참 동안 대항해 싸웠는데 적의 무리 가운데 화살에 맞아 죽은 자가 아주 많았다. 그러나 화살이 다 떨어져 정발이 적의 탄환에 맞아 전사하자 성이 마침내 함락되었다.

 
한편 동래 부사 송상현은 적이 바다를 건넜다는 소문을 듣고 지역 안의 주민과 군사 그리고 이웃 고을의 군사를 불러 모두 데리고 성에 들어가 지켰다. 병마 절도사(종2품 무관, 지역 사령관 겸임) 이각도 병영에서 달려왔다. 그러나 조금 지나서 부산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겁을 먹고 어쩔 줄 모르면서 핑계 대기를 “나는 대장이니 외부에 있으면서 협공하는 것이 마땅하다. 즉시 나가서 소산역에 진을 쳐야 하겠다”고 했다. 송상현이 남아서 같이 지키자고 간청했으나 그는 따르지 않았다. 성이 마침내 포위되자 송상현은 성의 남문에 올라가 전투를 독려했으나 한나절만에 성이 함락되었다. 송상현은 갑옷 위에 조정에 나아갈 때 입는 예복을 입고 의자에 앉아 움직이지 않았다.

 
왜장 다이노모리 히라시는 일찍이 동래에 왕래하면서 송상현의 대접을 후하게 받았다. 이 때 그가 먼저 들어와 손을 들고 옷을 끌며 빈틈을 가리키면서 피해 숨도록 했으나 송상현이 따르지 않았다. 적이 모여들어 생포하려 하자 송상현은 발로 걷어차면서 저항하다가 마침내 해를 입었다.

 
성이 막 함락되려고 할 때에 송상현은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스스로 부채에다 다음과 같이 적었다.


달무리처럼 포위당한 외로운 성           孤城月暈   
대진의 구원병은 오지 않는데             大鎭不救   
군신의 의리는 중하고                    君臣義重      
부자의 은혜는 가벼워라                  父子恩輕    


송상현은 이 부채를 가노(家奴)에게 주어 그의 아버지 송복흥에게 돌아가 보고하게 했다. 죽은 뒤에 왜장 히라하야 마코토가 보고서 탄식하며 시체를 관에 넣어 성밖에 묻어 주고 푯말을 세워 식별하게 했다. 송상현에게 천인 출신의 첩이 있었는데, 적이 그를 더럽히려 하자 굴하지 않고 죽었으므로 왜인들이 그를 의롭게 여겨 송상현과 함께 매장하고 표시를 했다. 또 양인 출신의 첩도 잡혔으나 처음부터 끝까지 굴하지 않자 왜인들이 공경해 별실에 두었다가 나중에 돌아가게 했다.


송상현은 기량이 탁월했으며 시를 잘 짓는 것으로 이름이 났다. 경인년에 간관(사헌부와 사간원의 벼슬아치를 모두 이르는 말)이 되고, 신묘년에 부사로 나갔는데, 실상은 배척당한 것이었다. 갑오년에 병마 절도사 김응서가 울산에서 왜장 가토 기요마사를 만났을 때, 가토 기요마사는 그가 의롭게 죽은 상황을 자세히 말했다. 또 집안 사람이 시체를 거두어 장사를 지내도록 허락하는 한편 경내를 벗어날 때까지 호위해 주었다. 이 때 적에게 함락된 유민들이 길에서 둘러서서 울며 전송했다.

 
부모의 은혜가 어찌 가벼울 수 있겠는가? 그러나 모순된 표현이지만 세상에는 ‘가장 중요한 것보다 더 중요한 것’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를 대의라 부른다. 7년에 걸친 일본과의 전쟁에서 수많은 전사자가 발생했다. 그러나 싸우다 죽은 장수들은 실로 몇 되지 않았다. 정발과 송상현은 직무를 다하고 대의를 위해 죽은 많지 않은 공직자에 포함되는 경우였다. 전쟁이 많았던 반면, 전쟁 때 싸우다 죽어 후세에까지 국민의 존경을 받는 장군은 많지 않았던 우리 역사에서, 그들은 군인과 공직자의 명예를 드높인 사람들이었다.

<노회찬과 함께 읽는 조선왕조실록, 도서출판 일빛,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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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18 22:36 2009/10/18 2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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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4월 13일, 새벽 안개를 뚫고 왜구가 바다를 건너왔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20여만 명의 군사와 36명의 장수를 이끌고 몇만 척의 배로 침략한 것이었다. 왕이 보고를 받은 것은 나흘 뒤인 4월 17일 오후였다. 그 무렵 상황을 「선조 실록」을 통해 보자.

부산에서 망을 보던 관리가 처음에 먼저 온 400여 척의 배를 보고 본진영에 알렸다. 그런데 변장(邊將)은 단지 처음 보고받은 것만을 근거로 이를 실제 수효로 여겼다. 그리하여 병마 절도사(종2품 무관)는 “적의 배가 4백 척이 채 못 되는데 한 척에 실은 인원이 몇십 명에 불과하니 그 대략을 계산하면 약 1만 명쯤 될 것이다”라는 보고를 올렸다. 따라서 조정에서도 그렇게 여겼다.

왕은 즉각 군사를 내려보내 방어에 나서도록 했다. 그러나 서울에서 내려간 정예병들도 죽거나 도망치는 패전을 거듭했다. 4월 28일 충주 전투에서 명장 신립 장군이 패배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조정은 전의를 상실했다. 서울을 버리고 피난 가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그 반대도 만만치 않았다. 『조선 왕조 실록』을 보자.

신하가 아뢰되 “전하께서 일단 도성을 나가시면 인심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전하의 가마를 맨 인부도 길가에 가마를 내버려 둔 채 달아날 것입니다”라며 목놓아 통곡하니 임금은 얼굴빛이 변해 내전으로 들어갔다.
 
4월 29일 여전히 찬반이 떠들석했으나 왕은 파천(왕이 왕궁을 버리고 피난 가는 일)을 결정했다. 상황은 이미 위기로 치닫고 있었다. 선조 25년(1592) 4월 29일의 실록은 그 광경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이 날 밤 호위하는 군사들은 모두 달아나고 궁문엔 자물쇠가 채워지지 않았으며 궁중의 물시계는 시간을 알리지 않았다.

4월 30일 새벽,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 속에서 왕은 피난을 떠났다. 대열은 채 백 명도 되지 않았다. 점심은 벽제에서 먹었는데 왕자들도 반찬 없이 맨밥을 먹었다. 저녁 무렵 임진강 나루에 도착해 강을 건너는 모습도 「선조 실록」은 전하고 있다.

저녁에 임진강 나루에 닿아 배에 올랐다. 왕이 신하들을 보고 엎드려 통곡하니 좌우가 눈물을 흘리며 감히 쳐다보지 못했다. 밤이 칠흑같이 어두운데 한 개의 등촉도 없었다.

동해안과 남해안에서 왜구가 자주 침탈했고, 왜적의 대대적인 침략을 경고하는 보고도 있었다. 따라서 이는 무방비와 안일에 젖은 지배 세력이 자초한 비극이었다.

비록 교통과 통신이 제대로 발달하지 못한 시절이었지만 외적의 침략에 대비한 봉화 제도는 이미 확립되어 있었다. 봉수대의 다섯 개 굴뚝에 각각 다른 수의 불을 때어 외적의 침입 정도를 몇 단계로 나누어 보고하는 봉화 제도는 조선 초기부터 중시된 것이었다. 왜적이 부산 앞바다로 침입해 온 임진 왜란의 경우 부산 다대포에서 경상도, 충청도와 경기도 광주 천림산을 거쳐 다시 서울 남산 봉수대로 이어지는 남방 루트를 통해 봉화가 전파되었어야 했다. 이 때 봉홧불이 제대로 올랐다면 서울에선 하루만에 전쟁 발생을 알았을 것이다.

북진해 오는 왜적에 대비하고 서울을 방비하는 데 사흘이라는 아까운 시간을 허비한 결과는, 밤비를 맞으며 왕이 서울을 버리고 가는 비극으로 나타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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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18 21:17 2009/10/18 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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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27일 이승만 대통령은 서울을 사수하겠다고 시민들을 안심시켰다. 그러나 그의 육성 녹음이 방송으로 나가고 있던 때 대통령은 이미 수도를 대전으로 옮기기 위해 서울을 떠나고 있었다. 대통령이 서울을 떠난 뒤 한강 다리는 폭파되었다.

역사는 되풀이되는가?1592년 4월 30일 새벽 선조는 서울을 버리고 임진강으로 향했다. 그러나 서울의 사대문은 여전히 굳게 닫혔으며 백성들이 피난 가는 것은 금지되었다. 당연하게도 밧줄을 타고 성을 빠져나가는 자들이 늘어났으며 약탈과 겁탈이 기승을 부렸다. 방화도 잇따랐다. 임진 왜란 때 일본군이 불태운 것으로 알려진 경복궁도 사실은 배신당한 조선 백성들이 불태운 것이었다. 「선조 수정 실록」은 이렇게 증언한다.

도성의 궁성에 불이 났다. 왕의 피난 행렬이 떠나려 할 즈음 도성 안의 간악한 백성이 먼저 내탕고(임금의 개인 재물을 두는 곳)에 들어가 보물을 다투어 가져갔다. 이윽고 행렬이 떠나자 난민이 크게 일어나 먼저 장례원과 형조를 불태웠다. 이는 두 곳의 관서에 공사 노비의 문서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는 마침내 궁성의 창고를 크게 노략하고 불을 질러 흔적을 없앴다. 경복궁·창덕궁·창경궁의 세 궁궐이 일시에 모두 타 버렸다. 역대의 보물과 문무루·홍문관에 간직해 둔 서적, 춘추관의 각 왕조 실록, 다른 창고에 보관된 고려 왕조의 사초, 『승정원 일기』가 모두 남김없이 타 버렸고, 내외 창고와 각 관서에 보관된 것도 모두 도둑을 맞거나 불탔다.

임해군의 집과 병조 판서 홍여순의 집도 불에 탔는데, 이 두 집은 평상시 많은 재물을 모았다고 소문이 났기 때문이었다. 유도 대장(留都大將)이 몇 사람을 참수해 군중을 경계시켰으나 난민이 떼로 일어나서 금지할 수 없었다.

이 때 불에 탄 경복궁은 고종 2년(1865)에 중건에 들어간다. 왕실의 권위와 위엄을 세우기 위한 대원군의 정책이었다. 경복궁 중건 비용을 염출하기 위해 통행세 따위 각종 세금이 강제로 부과되고 경기도내 백성들에겐 강제로 부역을 시켰다. “우리 나라 좋은 나무는 경복궁 짓는 데 다 들어간다”는 경복궁 타령의 가사처럼 전국 각지에서 채벌도 행해졌다. 백성들이 불태웠던 경복궁이 마치 백성들에게 ‘복수’하는 것 같았다. 이와 같이 백성들의 부담과 고통 속에서 2년만에 광화문·근정전·경회루를 포함해 경복궁은 중건되었다.

역사는 되풀이 되는가. 중건된 경복궁의 철거와 재중건이 이어졌다. 일본 제국주의는 경복궁의 남문인 광화문과 그 뒷편 궁궐들을 헐어 내고 그 자리에 식민 통치 기관인 조선 총독부의 청사를 세웠다. 총독부 청사는 미군정기에 군정청으로 사용되었고, 이 때부터 중앙청이라 일컬어졌다. 이윽고 정부 수립 후 이승만 대통령은 이 곳을 집무실로 사용했다. 그 뒤 박정희 대통령은 일제가 철거한 광화문을 복원시켰고, 청와대 경비를 구실로 경복궁 북문 안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이 부대는 12·12 사태 때 정치 군인들의 사령부로 이용되어 유명해졌다. 1996년 김영삼 대통령은 중앙청을 철거하고 이 부대를 철수시켜 대원군 시대 이후 처음으로 경복궁은 본연의 모습을 찾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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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18 21:14 2009/10/18 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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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 왜란은 본래 중국 명나라와 일본의 관계 악화로 일어난 것이었다. 명나라가 조공을 바치겠다는 일본의 청을 거절하자 일본은 명나라를 치기 위해 길을 내어 달라고 조선에게 요구하면서 침략을 감행한 것이다.


그러나 이 전쟁이 예고 없이 일어나자 “조선과 일본이 서로 짜고 조선이 침략당했다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유언 비어가 성행했다. 곧 “조선의 국왕과 용맹한 병사들은 명나라를 치기 위해 북쪽 국경에 가 있고 다른 사람을 가짜 왕으로 내세워 침략당했으니 도와 달라고 하는데, 실은 조선이 일본을 위한 향도(嚮導)가 된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이 유언 비어는 중국에까지 들어갔다. 선조 25년(1592) 5월 29일의 「선조 실록」은 이 유언 비어의 사실 여부를 조사하러 중국 사신이 파견된 일을 이렇게 설명한다.

 
(이 유언 비어에 대해) 중국 조정에서는 반신 반의하다가 병부상서 석성이 몰래 요동에 명을 내려 최세신과 임세록을 파견시켰다. 그들은 명분상으로는 왜적의 실정을 살핀다고 했지만 실은 평양으로 달려가서 우리 국왕과 만나 그 사실 여부를 확인하고 돌아가려는 의도였다.


사실 이 때 조선 조정은 중국에게 구원병을 요청하려 했다. 그런데 중국 요동·광동 사람들은 성품이 아주 포악해 그들이 강을 건너와서 우리 나라를 유린한다면 왜적에게 함락되지 않은 대동강 북쪽의 여러 고을들도 모두 황폐화할 것이라는 주장이 일었다. 이 두 의견으로 서로 논쟁하느라 오랫동안 해결이 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데 중국에서 유언 비어를 조사하기 위해 최세신과 임세록을 보냈다는 말을 듣고 조정은 중국 사신을 맞는 사절을 보냈다. 겉으로는 환영하면서도 실제로는 우리 나라의 피폐한 사정을 직접 호소해 중국 구원병이 오래도록 머물기가 어렵다는 것을 이야기하기 위해서였다.


유언 비어로 인한 오해를 푸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조선으로 건너온 중국 사신들이 직접 목격한 조선의 피해 상황이 유언 비어의 거짓을 입증해 준 것이다. 그러나 조선과 일본이 합작해 중국을 치려 한다는 소문을 들은 중국에서 사신까지 보내 확인하려 했다는 것은 만에 하나 그 ‘소문’이 사실일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강대국과 약소국, 종주국과 속국 관계라 하지만 서로 상대방을 완전히 믿을 수 없는 양국의 긴장 관계를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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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18 20:15 2009/10/18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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