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 왜란이 시작되어 왜군이 부산에 상륙한 이튿날인 1592년 4월 14일. 부산을 방어하던 두 명의 장수가 이 전쟁에서 처음으로 전사했다. 바로 부산 첨사(종3품 무관) 정발과 동래 부사 송상현이었다. 『조선 왕조 실록』은 이 두 명의 장수에 대한 자세한 기록을 전하고 있다.
부산포의 수비 대장 정발 장군은 이 전쟁에서 전사한 최초의 장수였다. 그는 4월 13일 부산 앞바다 절영도에서 사냥을 하다가, 바다를 뒤덮은 왜선들을 보고 조공하러 오는 왜라 여기고 대비하지 않았다. 나중에 황급히 성으로 돌아온 정발 장군은 사력을 다해 성을 방어했다. 그러나 14일 새벽에 적이 성을 백 겹으로 에워싸고 서쪽 성밖의 높은 곳에 올라가 포를 비오듯 쏘아 대었다. 정발이 서문을 지키면서 한참 동안 대항해 싸웠는데 적의 무리 가운데 화살에 맞아 죽은 자가 아주 많았다. 그러나 화살이 다 떨어져 정발이 적의 탄환에 맞아 전사하자 성이 마침내 함락되었다.
한편 동래 부사 송상현은 적이 바다를 건넜다는 소문을 듣고 지역 안의 주민과 군사 그리고 이웃 고을의 군사를 불러 모두 데리고 성에 들어가 지켰다. 병마 절도사(종2품 무관, 지역 사령관 겸임) 이각도 병영에서 달려왔다. 그러나 조금 지나서 부산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겁을 먹고 어쩔 줄 모르면서 핑계 대기를 “나는 대장이니 외부에 있으면서 협공하는 것이 마땅하다. 즉시 나가서 소산역에 진을 쳐야 하겠다”고 했다. 송상현이 남아서 같이 지키자고 간청했으나 그는 따르지 않았다. 성이 마침내 포위되자 송상현은 성의 남문에 올라가 전투를 독려했으나 한나절만에 성이 함락되었다. 송상현은 갑옷 위에 조정에 나아갈 때 입는 예복을 입고 의자에 앉아 움직이지 않았다.
왜장 다이노모리 히라시는 일찍이 동래에 왕래하면서 송상현의 대접을 후하게 받았다. 이 때 그가 먼저 들어와 손을 들고 옷을 끌며 빈틈을 가리키면서 피해 숨도록 했으나 송상현이 따르지 않았다. 적이 모여들어 생포하려 하자 송상현은 발로 걷어차면서 저항하다가 마침내 해를 입었다.
성이 막 함락되려고 할 때에 송상현은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스스로 부채에다 다음과 같이 적었다.
달무리처럼 포위당한 외로운 성 孤城月暈
대진의 구원병은 오지 않는데 大鎭不救
군신의 의리는 중하고 君臣義重
부자의 은혜는 가벼워라 父子恩輕
송상현은 이 부채를 가노(家奴)에게 주어 그의 아버지 송복흥에게 돌아가 보고하게 했다. 죽은 뒤에 왜장 히라하야 마코토가 보고서 탄식하며 시체를 관에 넣어 성밖에 묻어 주고 푯말을 세워 식별하게 했다. 송상현에게 천인 출신의 첩이 있었는데, 적이 그를 더럽히려 하자 굴하지 않고 죽었으므로 왜인들이 그를 의롭게 여겨 송상현과 함께 매장하고 표시를 했다. 또 양인 출신의 첩도 잡혔으나 처음부터 끝까지 굴하지 않자 왜인들이 공경해 별실에 두었다가 나중에 돌아가게 했다.
송상현은 기량이 탁월했으며 시를 잘 짓는 것으로 이름이 났다. 경인년에 간관(사헌부와 사간원의 벼슬아치를 모두 이르는 말)이 되고, 신묘년에 부사로 나갔는데, 실상은 배척당한 것이었다. 갑오년에 병마 절도사 김응서가 울산에서 왜장 가토 기요마사를 만났을 때, 가토 기요마사는 그가 의롭게 죽은 상황을 자세히 말했다. 또 집안 사람이 시체를 거두어 장사를 지내도록 허락하는 한편 경내를 벗어날 때까지 호위해 주었다. 이 때 적에게 함락된 유민들이 길에서 둘러서서 울며 전송했다.
부모의 은혜가 어찌 가벼울 수 있겠는가? 그러나 모순된 표현이지만 세상에는 ‘가장 중요한 것보다 더 중요한 것’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를 대의라 부른다. 7년에 걸친 일본과의 전쟁에서 수많은 전사자가 발생했다. 그러나 싸우다 죽은 장수들은 실로 몇 되지 않았다. 정발과 송상현은 직무를 다하고 대의를 위해 죽은 많지 않은 공직자에 포함되는 경우였다. 전쟁이 많았던 반면, 전쟁 때 싸우다 죽어 후세에까지 국민의 존경을 받는 장군은 많지 않았던 우리 역사에서, 그들은 군인과 공직자의 명예를 드높인 사람들이었다.
<노회찬과 함께 읽는 조선왕조실록, 도서출판 일빛,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