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과 같은 세계화 시대에 국경이 갖는 의미는 차츰 줄어들고 있다. 그러나 세계화 시대 이전에도 국경을 예사로이 무시하며 넘나들던 것이 있었으니, 바로 사랑과 예술 그리고 유행이었다. 조선 후기에 왕과 대신들이 많은 시간을 소비해 가며 문제로 삼았던 여인들의 가발은 국경을 넘어온 유행 가운데 하나다. 우리 나라에 가발 쓰는 풍조가 퍼진 것은 고려 시대부터다. 원래 몽고의 풍습이었던 가발은 원나라가 중국을 지배하던 시절에 고려로 들어온 것이다.
가발은 다른 사람의 머리카락으로 만들었는데, 머리카락의 양이 많을수록 더 많은 멋을 부릴 수 있었으며 자연히 값이 비쌀 수밖에 없었다. 양반집 부녀자들의 사치가 날로 성하던 조선 후기에는 가발 사치가 유행해 서로 높고 큰 가발을 쓰느라 경쟁이 치열했다. 이렇게 되자 영조 32년(1756) 1월 16일 왕이 직접 나서서 가발을 금지하고 족두리를 쓰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가발 유행은 왕의 지시 한 번으로 없어지지 않을 기세였던 모양이다. 영조 33년(1757) 11월 1일 「영조 실록」을 보자.
왕은 부녀자들의 가발을 금지하라고 하교를 내렸는데 홍봉한이 이렇게 말했다.
백성들의 집에서 혼례 때 가발을 사기 위해 심지어는 가산을 탕진하는 지경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러므로 금지령이 한 번 내리면 온 도성이 반드시 환영할 것입니다. 하지만 나라의 법률로 정한 뒤라야 비로소 금지할 수 있습니다.
「영조 실록」에 따르면 이 날의 대화에서 왕이 가발을 금지하고 족두리를 쓰게 하자고 말하면서도 족두리에도 온갖 사치를 부리는 폐단이 생길 새로운 가능성에 대해 염려할 정도였다. 그 무렵 이러한 사치 풍조의 유행은 부녀자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본디 당하관의 관복은 청록색의 녹포였는데 임진 왜란·병자 호란 뒤에 홍포로 바뀌어 중국 사람들이 군신이 같은 복장이라고 비웃을 정도였다. 이 또한 선홍색을 귀하게 여기는 사치 풍조에서 온 것이다.
영조의 가발 금지령은 성공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가발과의 전쟁’은 다음 왕인 정조 시절로 연장되었다. 정조 12년(1788) 10월 3일 비변사에서는 구체적인 ‘전투 지침’을 발표했다.
1. 가발 대신 머리를 땋아 뒤에 쪽을 찌는 형식으로 대신한다. 머리에 쓰는 것은 반드시 족두리를 사용하되, 무명으로 만든 것이나 얇게 깎은 대나무로 만든 것이나 가릴 것 없이 모두 검은 천으로 겉을 싼다.
1. 이번의 금지령은 오로지 사치를 없애겠다는 상감의 뜻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대용한다는 핑계로 여전히 족두리를 칠보 따위로 장식한다면, 제도를 고쳤다는 이름만 있고 검소함을 꾀하려는 내용은 없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머리를 장식하는 금옥·주패 및 진주 당개·진주 투심 따위를 모두 금지한다.
1. 족두리의 장식을 금지하는 것이 이미 금지령에 있으니, 혼인할 때 착용하는 칠보 족두리를 세놓거나 세내는 것부터 먼저 금지한다. 금지령을 공포한 뒤에 이를 어기는 사람은 누구든지 모두 법사로 이송해서 처벌한다.
1. 서울은 동짓날을 기한으로 정하고, 지방은 동짓날에 맞추어 관문을 발송하고 관문이 도착한 뒤 20일을 기한으로 정해 일제히 행한다.
1. 기한을 정한 뒤에도 금지령을 따르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적발되는 대로 그 가장을 특별히 엄하게 다스린다.
비변사의 지침이 보고되자 일부 대신들이 반기를 들었다. 이들은 왕에게 이렇게 말했다.
가발을 이미 족두리로 대신했기 때문에 부녀자들의 귀천의 표시가 없어졌으니, 지침을 시정하는 것이 옳습니다. 각자 남편의 직위에 따라 금이나 옥으로 만든 패를 품계에 따라 족두리 위에 붙여 등급을 표시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왕이 다른 신하들에게 의견을 물으니 예조 판서 이재간과 도승지 심풍지만이 전에 없던 격식을 새로 만들어 낼 필요가 없다고 반대했다. 그러자 왕이 단호하게 말했다.
지금 평복 가운데 평복이요 사복 가운데 사복인 족두리에 갑자기 바둑알만한 옥조각이나 금덩이를 붙일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칠보로 장식한 것을 세내어 쓰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문명으로 야만을 변화시키겠다는 뜻을 이미 말한 바 있는데, 족두리 위에 추가로 단다면 도리어 본 뜻에 어긋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왕명도 가발 사치를 없애지 못했다. 가발 유행을 없앤 것은 명령이 아니었다. 파마 머리니 단발 머리니 하는 새로운 유행이었다.
<노회찬과 함께 읽는 조선왕조실록, 도서출판 일빛,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