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에서 순종에 이르기까지 조선의 왕은 모두 27명이다. 그러나 『조선 왕조 실록』에 기록된 조선 왕조의 왕은 36명이다. 그렇다면 일반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9명의 왕은 누구인가? 목조·익조·탁조·환조·덕종·원종·진종·장종·익종이 바로 그들이다.

 조선의 제21대 왕 영조에겐 두 명의 아들이 있었다. 맏아들인 효장 세자는 1728년 아홉 살의 나이로 병에 걸려 죽었다. 그 후 1735년에 태어난 둘째 아들이 바로 뒷날 사도 세자로 유명한 장헌 세자였다. 그러나 하나밖에 남지 않은 아들인 장헌 세자도 1762년 영조의 미움을 받아 뒤주에 갇혀 죽임을 당했다. 영조는 사도 세자가 죽자 사도 세자의 아들을, 이미 죽은 효장 세자의 양아들로 입적시킨 뒤 그를 세자로 책봉했으니, 그가 바로 영조에 이어 왕위에 오른 정조였다.

 
왕이 되자 정조는 자신의 친아버지인 사도 세자와 양아버지인 효장 세자를 각각 장종과 진종으로 추서했다. 사도 세자는 죽어서 왕이 된 셈이다. 이처럼 세자가 일찍 죽어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그의 자식이 왕위에 올랐을 때, 왕이 되지 못하고 죽은 아버지를 왕으로 추서하는 관례가 있었다. 성종의 생부인 의경 세자가 덕종이 되고 헌종의 생부 효명 세자가 익종으로 추서된 것도 마찬가지다.

이와 달리 세자의 핏줄이 아니면서 왕위에 오를 경우 그의 생부는 대원군으로 봉해졌다. 다만 한 명의 예외가 있었으니 인조의 생부 정원군이다. 정원군은 세자가 아니었는데도 그의 아들이 왕위에 오르자 대원군이 아닌 원종으로 추서되었다. 인조가 서인 세력을 등에 업고 쿠데타를 일으켜 광해군을 내쫓고 난 뒤, 광해군의 배다른 형제인 자신의 아버지 정원군을 전례 없이 왕으로 추서한 것은 자신이 선조로부터 이어지는 왕위 계승의 정통성을 이어받았음을 강변하려는 의도였다.

목조·익조·탁조·환조는 모두 태조 이성계의 고조할아버지·증조할아버지·할아버지·아버지다. 4대조까지 거슬러 올라가 왕위를 추서함으로써 창업 왕조의 정통성을 강화하려 했던 결과다.



<노회찬과 함께 읽는 조선왕조실록, 도서출판 일빛,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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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18 22:58 2009/10/18 2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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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과 같은 세계화 시대에 국경이 갖는 의미는 차츰 줄어들고 있다. 그러나 세계화 시대 이전에도 국경을 예사로이 무시하며 넘나들던 것이 있었으니, 바로 사랑과 예술 그리고 유행이었다. 조선 후기에 왕과 대신들이 많은 시간을 소비해 가며 문제로 삼았던 여인들의 가발은 국경을 넘어온 유행 가운데 하나다. 우리 나라에 가발 쓰는 풍조가 퍼진 것은 고려 시대부터다. 원래 몽고의 풍습이었던 가발은 원나라가 중국을 지배하던 시절에 고려로 들어온 것이다.

 
가발은 다른 사람의 머리카락으로 만들었는데, 머리카락의 양이 많을수록 더 많은 멋을 부릴 수 있었으며 자연히 값이 비쌀 수밖에 없었다. 양반집 부녀자들의 사치가 날로 성하던 조선 후기에는 가발 사치가 유행해 서로 높고 큰 가발을 쓰느라 경쟁이 치열했다. 이렇게 되자 영조 32년(1756) 1월 16일 왕이 직접 나서서 가발을 금지하고 족두리를 쓰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가발 유행은 왕의 지시 한 번으로 없어지지 않을 기세였던 모양이다. 영조 33년(1757) 11월 1일 「영조 실록」을 보자.

 
왕은 부녀자들의 가발을 금지하라고 하교를 내렸는데 홍봉한이 이렇게 말했다.

 
백성들의 집에서 혼례 때 가발을 사기 위해 심지어는 가산을 탕진하는 지경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러므로 금지령이 한 번 내리면 온 도성이 반드시 환영할 것입니다. 하지만 나라의 법률로 정한 뒤라야 비로소 금지할 수 있습니다.

 
「영조 실록」에 따르면 이 날의 대화에서 왕이 가발을 금지하고 족두리를 쓰게 하자고 말하면서도 족두리에도 온갖 사치를 부리는 폐단이 생길 새로운 가능성에 대해 염려할 정도였다. 그 무렵 이러한 사치 풍조의 유행은 부녀자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본디 당하관의 관복은 청록색의 녹포였는데 임진 왜란·병자 호란 뒤에 홍포로 바뀌어 중국 사람들이 군신이 같은 복장이라고 비웃을 정도였다. 이 또한 선홍색을 귀하게 여기는 사치 풍조에서 온 것이다.

 
영조의 가발 금지령은 성공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가발과의 전쟁’은 다음 왕인 정조 시절로 연장되었다. 정조 12년(1788) 10월 3일 비변사에서는 구체적인 ‘전투 지침’을 발표했다.

 
1. 가발 대신 머리를 땋아 뒤에 쪽을 찌는 형식으로 대신한다. 머리에 쓰는 것은 반드시 족두리를 사용하되, 무명으로 만든 것이나 얇게 깎은 대나무로 만든 것이나 가릴 것 없이 모두 검은 천으로 겉을 싼다.

1. 이번의 금지령은 오로지 사치를 없애겠다는 상감의 뜻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대용한다는 핑계로 여전히 족두리를 칠보 따위로 장식한다면, 제도를 고쳤다는 이름만 있고 검소함을 꾀하려는 내용은 없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머리를 장식하는 금옥·주패 및 진주 당개·진주 투심 따위를 모두 금지한다.

1. 족두리의 장식을 금지하는 것이 이미 금지령에 있으니, 혼인할 때 착용하는 칠보 족두리를 세놓거나 세내는 것부터 먼저 금지한다. 금지령을 공포한 뒤에 이를 어기는 사람은 누구든지 모두 법사로 이송해서 처벌한다.

1. 서울은 동짓날을 기한으로 정하고, 지방은 동짓날에 맞추어 관문을 발송하고 관문이 도착한 뒤 20일을 기한으로 정해 일제히 행한다.

1. 기한을 정한 뒤에도 금지령을 따르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적발되는 대로 그 가장을 특별히 엄하게 다스린다.

 비변사의 지침이 보고되자 일부 대신들이 반기를 들었다. 이들은 왕에게 이렇게 말했다.

 
가발을 이미 족두리로 대신했기 때문에 부녀자들의 귀천의 표시가 없어졌으니, 지침을 시정하는 것이 옳습니다. 각자 남편의 직위에 따라 금이나 옥으로 만든 패를 품계에 따라 족두리 위에 붙여 등급을 표시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왕이 다른 신하들에게 의견을 물으니 예조 판서 이재간과 도승지 심풍지만이 전에 없던 격식을 새로 만들어 낼 필요가 없다고 반대했다. 그러자 왕이 단호하게 말했다.

지금 평복 가운데 평복이요 사복 가운데 사복인 족두리에 갑자기 바둑알만한 옥조각이나 금덩이를 붙일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칠보로 장식한 것을 세내어 쓰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문명으로 야만을 변화시키겠다는 뜻을 이미 말한 바 있는데, 족두리 위에 추가로 단다면 도리어 본 뜻에 어긋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왕명도 가발 사치를 없애지 못했다. 가발 유행을 없앤 것은 명령이 아니었다. 파마 머리니 단발 머리니 하는 새로운 유행이었다.

<노회찬과 함께 읽는 조선왕조실록, 도서출판 일빛,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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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18 22:30 2009/10/18 2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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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에 숨어 살며 농사나 짓던 떠꺼머리 총각이 하루 아침에 왕이 되었는데 그가 바로 철종이다. 강화 도령 철종에 대해 이렇게 알고 있는 이가 많다. 그러나 정확히 말한다면 강화 도령은 강화도에 숨어 산 것이 아니었다. 그 무렵 강화 도령 이원범은 소재가 정확히 파악되고 가끔 동정이 보고되는 유배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는 왜 강화도에서 유배 생활을 했는가

강화 도령 이원범은 사도 세자의 증손자며 영조의 고손자다. 영조에겐 두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장남 효장 세자는 어려서 병으로 죽고 차남 사도 세자는 아버지 영조의 명으로 뒤주 속에서 죽었다. 그래서 왕위는 사도 세자의 둘째 아들인 정조로 이어졌다. 정조에게도 두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첫째인 문효 세자가 어려서 죽자 순조가 왕위를 계승했다. 순조에겐 외아들 효명 세자가 있었지만 그는 왕이 되기 전에 죽었고, 이에 따라 왕위는 효명 세자의 외아들인 헌종으로 넘겨졌다. 그런데 헌종에겐 아들이 없었고 외동딸만 있었다. 그리하여 헌종이 죽자 직계 혈통으로 왕위를 이어받을 사람은 한 명도 없었던 것이다.

24대 왕인 헌종이 죽자 21대 영조의 자손 중에서 사도 세자의 아들 3명을 제외한 모든 혈통이 끊긴 셈이 되었다. 사도 세자의 아들로는 22대 왕이 된 정조 외에 은언군·은신군·은전군이라는 세 명의 아들이 더 있었다. 그러나 이들 세 명의 아들과 그들의 후손은 모두 사도 세자 못지 않은 비극적인 말로를 맞이했다. 사도 세자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세력들이 후환을 우려해 정조가 아닌 다른 왕자를 추대한 사건에 연루되어, 은전군은 자결하고 은언군과 은신군은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유배 중이던 은신군은 제주도에서 병으로 죽고 은언군은 강화도로 다시 유배된 것이다. 그러나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은언군의 큰아들인 상계군은 1779년 홍국영의 모반 사건에 연루되어 자결했고, 은언군과 은언군의 아내 송씨 그리고 큰며느리(상계군의 부인) 신씨는 천주교 신자임이 드러나 1801년 사약을 받고 죽었다. 은언군의 둘째 아들 이광에겐 세 아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도 1844년의 모반 사건에 연루되어 이광과 그의 장남 이원경은 사약을 받고 죽었다. 둘째 아들인 이경응은 유배지 강화도에서 병으로 죽고 셋째 아들만 남았는데 그가 바로 이원범, 나중에 철종이 된 사람이다.

헌종이 후사 없이 죽었을 때 가장 가까운 방계 핏줄은 바로 강화 도령 이원범이었으니 그가 왕위를 계승한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그러나 집안 내력을 볼 때 헌종과 철종은 같은 핏줄이면서도 대를 이은 원수지간이기도 하다. 철종의 관점에서 보면 그의 증조할아버지인 사도 세자와 작은할아버지인 은전군은 고조할아버지인 영조의 손에 죽었고, 큰아버지인 상계군은 작은할아버지인 정조 때 모반 사건에 연루되어 죽었다. 또 할아버지인 은언군과 할머니와 큰어머니는 철종의 당숙인 순조에게 사약을 받아 죽었으며, 아버지 이광과 큰형 이원경은 순조의 손자인 헌종에게 죽임을 당했다. 그리고 나서 유일하게 살아 남은 철종은 자신의 집안에 피바람을 일으켰던 집안의 후계자로서 왕위를 계승받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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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18 22:02 2009/10/18 2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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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주가 우리 나라에 들어온 것은 1277년 고려 말 충렬왕 때였다고 한다. 소주의 원산지는 페르시아 지역이다. 페르시아의 증류법은 12세기 십자군 전쟁 때 유럽으로 건너갔고 포도주를 증류한 브랜디를 낳았다. 또 이 술은 고려를 침략한 몽고군을 통해 우리 나라로 들어왔다. 페르시아 말로 증류주를 뜻하는 ‘아라키’라는 이 술이 개성에서 ‘아락주’로 일컬어진 것도 이 같은 배경에서였다. 또 일본 침입을 위한 몽고군 병영이 안동에 있었기 때문에 지금도 안동은 소주로 유명한 고장이다.

소주는 곡식을 증류해 만드는 술인지라 조선 초기에는 주로 약으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대마도·유구국(지금의 오키나와)을 비롯한 일본의 사신이 올 때 하사하는 물품이기도 했다. 성종 21년 4월 10일의 「성종 실록」은 그 무렵 소주 마시는 풍습이 널리 퍼졌음을 말해 준다.

사간 조효동이 아뢰었다.

“세종조에는 사대부 집에서 소주를 쓰는 일이 드물었는데 지금은 보통 잔치에서도 모두 쓰므로 낭비가 큽니다. 청컨대 모두 금지하도록 하소서.”그러자 임금이 말했다.

“이와 같은 일은 사헌부에서 마땅히 금지해야 할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는가?”특진관 손순효가 대답했다.

“일일이 금지하기는 어렵습니다.”

또한 지사 어세겸이 말했다.

“소주를 낭비한다고 하지만 가난한 사람은 스스로 만들 수 없습니다. 또한 국가에서 어찌 개인 집에서 소비하는 것을 억눌러서 절제시킬 수 있겠습니까?”

그 뒤 흉년이 들어 양곡이 모자랄 때마다 소주 제조 금지령이 내려졌다. 그러나 소주는 차츰 민간 속에 뿌리를 내렸다. 또 지금의 희석식 소주와는 달리 증류식으로 만든 그 무렵의 소주는 알콜 도수가 높고 독했기 때문에, 폭음해 죽는 사람도 자주 있었다.

중종 10년(1516) 4월 23일의 「중종 실록」은 일찍이 장원 급제한 뒤 청렴하고 유능한 관리로 이름 높던 제주 목사 성수재가 소주를 많이 마셔 죽은 소식을 다루고 있다. 이처럼 소주를 폭음하고 죽은 고위 관료의 이야기는 심심찮게 『조선 왕조 실록』에 등장한다.

『조선 왕조 실록』에 등장하는 소주에 얽힌 사건 가운데 백미는 영조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것이다. 영조 12년(1736) 4월 24일 야간 경연(임금 앞에서 경서를 강의하던 자리)이 끝난 뒤 조명겸은 왕을 찾아가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사람들 사이에 떠도는 말을 가만히 들어 보니, 전하께서 술을 끊을 수 없다고들 합니다. 신이 그 거짓과 참을 알지 못하지만 오직 바라건대, 조심하고 염려하며 경계하도록 하소서."

그러자 임금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목이 마를 때에 이따금 오미자차를 마시는데, 남들이 가끔 소주로 의심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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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18 21:25 2009/10/18 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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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쟁 이후 몇십 년 동안 이어져 온 야간 통행 금지 제도를 없앤 것은 제5공화국이라는 인기 없는 정권의 민심 수습책이었다. 밤 12시부터 새벽 4시까지 계속되는 통행 금지 시간에 예외로 나다니려면 위급한 사정을 인정받고 임시 통행증을 발급받아야만 했다. 이 임시 통행증은 종이에 증명서 식으로 된 것이었는데 팔뚝에다 고무 도장을 찍어 줄 때도 있었다.


조선 시대에도 야간 통행 금지 제도가 있었다. 통행 금지는 오후 10시부터 다음날 새벽 4시까지였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궁궐문은 초저녁에 닫고 해뜰 때에 열며, 도성문은 인정에 닫고 파루에 연다”고 되어 있다. 인정은 통금 시작을 알리는 스물여덟 번의 종소리를 말하고 파루는 통금 해제를 알리는 세른세 번의 종소리를 말한다. 종을 스물여덟 번 치는 것은 우주의 일월 성신 28수에 고하기 위함이요, 서른세 번은 하늘의 33천에 알려 그 날의 안녕을 기원하는 뜻이었다


모든 일에 예외가 있듯이 야간 통행 금지 제도가 실시되던 조선 시대에도 야간 통행증이 있었는데 성균관 학생들의 야간 통행증은 바로 왕이 하사한 술잔이었다. 효종 시절에 왕은 은으로 만든 술잔을 성균관에 내렸는데 그 술잔에는 ‘성균관에 하사한다’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혹시 제사를 지내거나 왕에게 상소할 때에는 깊은 밤이라도 유생이 이 술잔을 가지고 나가면 순찰하는 나졸도 감히 묻지 못했다.


그런데 영조 30년(1754) 1월 28일 성균관의 한 유생이 야간 통행 금지를 어겼다 해 관가로 끌려가 곤장을 맞는 일이 벌어졌다. 순찰하던 나졸이 술잔을 갖고 나온 유생을 잡아 그를 곤장으로 때리고 잔을 돌려 보낸 것이다. 성균관 유생들은 곧바로 동맹 휴학을 하고 규탄했다. 그러자 왕은 포도청 대장을 엄하게 벌하도록 명하고 유생들을 달래 학교로 돌아가도록 했다. 인왕산에 호랑이가 나타나던 시절의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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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18 19:57 2009/10/18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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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이 검소하게도 칼국수를 자주 드신다는 것은 지금은 웬만한 국민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조선 시대에 구중 궁궐 깊은 곳에서 왕이 무엇을 먹는지는 자세히 알려질 수 없었다. 다만 영조 44년(1768) 7월 28일 「영조 실록」에는 드물게 왕의 음식 타령이 기록되어 있다.

 
내의원 신하가 임금을 뵙자 임금이 말했다.

“송이·날 전복·어린 꿩고기·고초장(고추장), 이 네 가지 맛이 있으면 밥을 잘 먹으니, 그러고 보면 입맛이 완전히 늙은 것은 아니다.”


그러자 도제조 김양택이 말했다.

“그러시면 날 전복을 공물로 올리도록 지시하겠습니다.”

임금이 말했다.

“그만둬라. ‘공자는 꿩고기를 냄새만 세 번 맡고 일어났다’고 했다. 날 전복을 갖다 바치는 데 공이 많이 들므로 영의정이 어사로 있을 때 ‘한 마리 전복도 민폐를 끼친다’고 말하지 않았느냐. 지금 민간에 병충해가 몹시 심한데, 어찌 정당한 공물 외에 때가 아닌 물건을 구해 배를 채우겠는가? 마땅히 바쳐야 할 것 말고는 받지 않겠다.”


여기서 눈에 띄는 것은 고추장에 관한 대목이다. 고추장은 김치와 더불어 우리 나라 사람들에게 빼놓을 수 없는 음식이다. 외국에 원정간 선수들이 고추장과 김치를 먹고 힘을 냈다는 말도 있다. 이처럼 이들 음식은 단순한 반찬이 아니라 민족적 일체감과 자부심을 상징하는 ‘정신적 지주’의 하나로 승격해 있다. 그러나 고추장과 김치는 한국의 고유한 음식일 수는 있어도 전통과 역사를 자랑할 만큼 오래된 음식은 아니다.


고추가 우리 나라에 들어온 것은 1615년부터였다. 그러니까 지금처럼 시뻘건 김치와 고추장은 그 이전에는 있을 수 없었다. 고추 대신 쓰이던 것은 후추였는데, 이 또한 대마도나 중국의 사신이 왕에게 선물로 바치던 것이라 일반 백성들은 구경하기도 어려운 귀한 물건이었다. 조정의 대신들도 특별한 날에 왕으로부터 몇 알씩의 후추를 하사받았을 뿐이다. 그래서 조선 중기까지의 김치는 고추가 들어가지 않고 소금으로 간을 맞춘 백김치와 동치미 또는 간장으로 버무린 장김치밖에 없었다.


요즘 김치 재료로 가장 많이 쓰이는 배추 또한 서양 종자를 개량한 것으로서 19세기 말에야 우리 나라에 들어왔다고 한다. 그러니까 지금과 같은 모습과 맛의 김치는 겨우 1백 년의 역사를 거쳐 가장 한국적인 음식으로 발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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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18 19:55 2009/10/18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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