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에는 왕이 승하하면, 임시로 실록청을 설치하고 전대 왕의 실록을 편찬했다. 이 때 이용된 자료는 춘추관 시정기(정부 각 기관이 보고한 문서), 사초(전대 왕 재위 때 사관들이 작성한 기록), 승정원 일기, 의정부 등록, 비변사 등록, 일성록 들이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실록은, 조선 태조 때부터 철종에 이르기까지 25대 472년 동안의 기록을 담고 있다. 이를 일컬어 『조선 왕조 실록』이라 부른다. 오늘날 국보 151호로 지정되어 있다.

한편 1907년 일본과 친일 세력의 강요로 왕위에서 물러난 고종과, 1910년 한일 합방으로 물러난 순종의 실록은, 일본인들이 1935년에 만들었다.

『조선 왕조 실록』의 원본은 한문으로 쓰여졌는데 모두 1,893권에 이른다. 1993년에 완료된 한글 번역본(한국판)은 모두 413권이다. 이 한글 번역본을 단 3장의 디스크에 담은 CD-ROM 타이틀이 1995년에 출판되기도 했다.

『조선 왕조 실록』은 우선 그 양이 방대한 만큼, 조선 시대의 사정을 가장 풍부하게 알려 준다. 물론 왕과 조정을 중심으로 기록했기 때문에, 백성들의 밑바닥 삶을 제대로 담아 내지 못한 근본적인 한계를 갖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역대 왕조의 기록을 이만큼이나마 집대성했다는 의미에서 중요한 문화 유산이 아닐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 왕조 실록』은 오늘날 많은 역사가들과 문학가들에게 연구와 창작, 그리고 상상력의 보고로 애용되고 있는 것이다.

『조선 왕조 실록』은 시대순으로 그리고 날짜별로 기록되어 있는데, 가장 큰 특징은 그것이 형식적인 일지가 아니라는 점이다. 무엇보다도 사실을 객관적으로 기록한다는 취지에 따라, 왕이 승하한 뒤 후대에 완성토록 했다. 그러니까 자신의 실록을 본 왕은 있을 수 없었다.

한편 사관을 두어 왕의 언행을 가까이에서 기록해 사초로 남기게 했다. 이 사초는 나중에 실록을 작성할 때 중요 자료가 되었다. 따라서 이 사초 또한 왕이 볼 수 없는 것이 원칙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미 만들어진 선대 왕의 실록을 보는 것도 금지되었다. 조선 초기에 실록과 사관 제도를 정립하는 과정에서나, 연산군과 같은 폭군의 재위 때에는, 실록과 사초의 열람 금지 원칙이 다소 시련을 겪기도 했다.

태조 1년(1393) 3월 23일 왕과 신하들의 대화는 사관에 대한 왕의 인식 변화를 짐작케 한다.

 임금이 신하들에게 물었다.

 “어제 사냥하는 곳에 사관이 따라온 것은 무슨 까닭인가?”

모두 대답했다.

 

“사관의 임무는 그때 그때 일어난 일들을 기록하는 것입니다. 하물며 임금의 거동이겠습니까?”


한 신하가 앞으로 나아가서 말했다.


“임금은 구중 궁궐에 있으니 날로 경계심이 풀리고 날로 게으른 마음이 생겨납니다. 그래도 누가 말릴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임금은 오직 하늘과 역사를 두려워할 뿐입니다.”

 

임금이 말했다.


“왜 그런가?”

 

신하가 대답했다.

 

“하늘은 형상이 없으나, 착한 것은 복을 주고 음란한 것은 화를 줍니다. 또한 역사는 정치의 좋고 나쁜 것과 행동의 잘잘못을 곧게 기록하고 만세에 전하니, 효자나 자손이 마음대로 고치지 못합니다. 그러니 두려운 일이 아닙니까?”

 

임금이 말했다.

 

“그렇다.”

 

신하가 또 말했다.

 

“비록 사관에게 임금을 뵙지 못하게 한다 하더라도, 다섯 승지가 모두 춘추관을 겸하기 때문에 임금의 모든 일거수 일투족을 기록합니다.”

 

임금이 처음에는 그것을 알지 못하고, 늘 가까이 있기 때문에 자못 소홀히 여겼다. 그러나 이 때부터 언행을 더욱 겸손하고 조심스럽게 했다.


비록 사관 제도를 받아들인다 해도, 늘 가까이에서 자신의 언행을 빠짐없이 사초에 기록하는 사관은 왕에게 부담스러운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왕 가까이 두 사람의 사관을 두어 좌측의 사관은 왕의 행동을, 그리고 우측의 사관은 왕의 발언을 기록했다. 이 같은 제도는 세종 때부터 시행된 것이다. 조선 시대 왕들의 사관에 대한 태도는 조금씩 다르지만, 가장 대조적인 경우는 세조와 연산군이다.

세조 2년(1457) 8월 23일의 기록을 보자.

 

왕이 사정전에 나아가니, 화천군 권공·우승지 조석문·좌부승지 윤자운·우부승지 한계미·동부승지 권지·승문원 교리 홍일동·사관 김이용 들이 왕을 모셨다. 왕이 김이용에게 술을 올리도록 명하고 말했다.

 

“나의 잘못하는 바를 네가 지적할 수 있느냐?”

 

김이용이 대답했다.


“옳은 말로 충고를 드리는 것은 소신의 임무가 아니기 때문에, 황공해 말을 못 합니다.”

 

임금이 조석문을 돌아보며 말했다.


“사관의 말에 대한 너의 생각이 어떠하냐?” 


조석문이 대답했다.

 

“위로 공경(公卿)으로부터 아래로 모든 집사관에 이르기까지 누구나 임금의 잘못을 다 말할 수 있습니다.”

 

임금이 말했다.

 

“승지의 말이 옳다. 사관이 실언한 듯하다.”

 

임금이 술로써 벌을 주라고 명하고 말했다.

 

“나의 잘잘못은 만인의 눈이 지켜 보는 것이니 숨길 수 없다. 사관은 마땅히 사실대로 자세히 기록해야 한다. 앞으로는 내가 무술을 배울 때에 반드시 사관을 두 사람 갖추어라. 한 사람에게 사고가 생기면 미처 자세히 기록하지 못할까 염려하는 것이다. 너희 승지들 또한 반드시 다 기록하라. 일을 기록하는 우리 나라 글이 중국의 글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다만 사실을 빠뜨리지 말고 글을 만들되, 서툰 것은 꼭 염려할 것이 아니다.”

 

한편 연산군의 태도는 거칠 것 없는 세조의 태도와 상반되었다. 연산군 12년(1506) 7월 9일의 「연산군 일기」에 나오는 왕의 발언을 들어 보자.

 

임금이 하는 일을 기록하지 않을 수는 없다. 하지만 하늘이 하는 바를 어찌 사람이 논할 수 있으며, 임금이 하는 일을 어찌 신하가 시비할 수 있겠는가.

 

옛말에 이르기를 “글을 다 믿는다면 글이 없는 것만 못하다”고 했다. 그러므로 『춘추』에 기록된 글 또한 다 믿을 수 없다. 그래서 전에 이미 사관에게 임금의 과실은 기록하지 못하게 했노라.

 

「선조 실록」은 광해군 때 북인들이 권세를 잡았을 무렵 만들어졌다. 그런데 북인들을 일방적으로 좋게 기록했다고 해, 나중에 권세를 잡은 서인들이 이번에는 그들의 관점을 살려 「선조 수정 실록」이라는 개정판을 낸 일이 있었다. 또한 「단종 실록」, 「연산군 일기」, 「광해군 일기」 같은 쫓겨난 왕의 실록은, 쫓아 낸 왕의 재위 기간에 만들었기 때문에 전대 왕에 대해 편파적으로 기록할 가능성도 없지 않았다. 그런데도 수많은 견제와 경계 속에서 사초는 작성되었고, 『조선 왕조 실록』은 완성되어 갔다.

 

이처럼 『조선 왕조 실록』은 비행기의 블랙 박스와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1983년 소련 영공에서 KAL 항공기 한 대가 소련 전투기에 격추되어, 몇백 명의 인명이 차가운 사할린 앞바다에 떨어졌다. 왜 KAL 기가 소련 영공을 장시간 비행했는지, 소련 전투기는 이 비행기가 비무장 민간 항공기임을 알았는지, 또한 사전 경고는 없었는지 하는 사건의 실상은, 15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비행기의 항로 변경과 조정기 조작 상황 그리고 조종사들 사이의 대화 기록 따위를 담은 블랙 박스가 발견되지 않았기때문이다. 이 블랙 박스가 발견되지 않는 한, 이 사건의 진실은 영원히 묻혀질지도 모른다. 반면 오늘날 우리가 이만큼이라도 조선 왕조 오백 년의 진실을 알 수 있는 것은, 조선 왕조의 블랙 박스인 『조선 왕조 실록』이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대통령은 조선 시대의 왕보다 권한이 더 작고 재임 기간도 더 짧다. 그래서 정권도 몇 차례 바뀌었지만 우리에겐 실록도 없고 사관도 없다. 말하자면 이 시대에는 블랙 박스가 없는 것이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비리니 의혹이니 특별 검사제 도입이니 하는 소리가 높다. 또한 청문회가 열리고 전직 대통령이 구속까지 되는 사태가 일어나지만, 진실이 다 밝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이러한 혼란은 『조선 왕조 실록』과 같은 블랙 박스가 없기 때문이 아닐까?

 

청와대에는 대통령의 공식 일정과 주요 발언을 기록하는 통치 사료 담당관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담당관이 작성한 ‘통치 사료’는 대통령이 퇴임할 때 가져가는 기념품일 뿐이다. 또한 통치 사료 담당관이 조선 시대의 사관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도 물론 아니다.

 

만일 조선 시대처럼 사관이 있어서 대통령의 일거수 일투족을 기록하고 사초를 작성한다면 어떨까. 그러면 우리는 비리니 국정 조사니 하여 사회 전체가 떠들썩해지는 혼란을 피하고 차분히 진실을 대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사관이 지키고 서 있다면, 의혹을 살 일은 처음부터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드물기 때문이다. 역대 정치사의 많은 잘못들은, 국민은 물론 역사마저도 속일 수 있다는 만용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그래서 『조선 왕조 실록』은 오늘의 우리에게 충고하고 있다. “너희도 실록을 써라!”

<노회찬과 함께 읽는 조선왕조실록, 도서출판 일빛, 2004>

이올린에 북마크하기
2009/10/18 23:27 2009/10/18 23:27
Leave a Comment
[로그인][오픈아이디란?]

 

연산군은 1494년 성종이 죽자 왕위를 계승했다. 왕이 된 연산군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사슴을 죽여 불고기 파티를 연 것과 자신의 스승 조자서를 죽인 일이었다. 연산군이 죽인 사슴은 선왕인 성종이 아끼던 것으로, 그 전에 연산이 이 사슴을 발로 걷어차는 바람에 왕으로부터 야단을 맞은 일이 있었다. 또 조자서는 연산의 선생 가운데 가장 엄격하게 연산을 지도했던 사람이었다.

 
연산은 절대 권력이던 왕권의 힘으로, 타락한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악행과 패륜을 저질렀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사냥 놀이를 위해 민가를 쓸어 버리고, 창덕궁에서 노는 것이 보일지 모른다 해 남산 밑의 집들을 철거했다. 전국 각지에서 매와 사냥개를 거둬들여 궁중에서 키우는가 하면, 말과 당나귀도 계속 거둬들이고 궁궐 뒤뜰에서 동물들의 교접 광경을 시녀들과 즐기기도 했다. 몇천 명의 처녀들을 잡아들여 노리개로 삼는가 하면 사대부의 부인은 물론 종친까지도 범하는 패륜을 일삼았다.

 
연산의 하루하루는 사람 죽이기 아니면 궁녀들과 노는 것이었다고 「연산군 일기」는 적고 있다. 노는 방식도 상식을 뛰어넘기 일쑤였는데 예컨대 이런 식이다.


왕이 경복궁에 이르러 대비에게 잔치를 드리고, 잔치가 끝나자 말 1천여 필을 들이게 해 흥청을 싣고 탕춘대에 가, 상궁 나인과 길가에서 간음했다.


연산은 이처럼 길가에서 간음하는 데 쓰기 위해 아예 이동식 러브 호텔을 지어 행차 때는 가지고 다니기도 했다.

 
1505년 6월 18일의 「연산군 일기」를 보자.


왕이 궁중에 방을 많이 두어 음탕한 놀이를 하는 곳으로 삼았다. 또 작은 방을 만들어서, 언제나 밖으로 나가 즐길 때면 사람들을 시켜서 들고 따르게 했다. 비록 길가일지라도 흥청과 음탕한 놀이를 하고 싶으면 문득 이것을 설치하고서 들어갔다. 그 방을 이름 붙여 ‘거사(擧舍)’라 했다.


거사라니 ‘들고 다니는 집’도 되거니와 ‘일을 저지르는 집’이란 뜻도 될 것이다. 이동식 러브 호텔의 이름치고는 운치가 있다고나 할까. 그러나 거사에서 놀던 연산은 바로 10개월 뒤에 진짜 거사(擧事)를 만나 쫓겨나게 됐다. 그것이 바로 중종 반정이다.


<노회찬과 함께 읽는 조선왕조실록, 도서출판 일빛, 2004>

이올린에 북마크하기
2009/10/18 23:23 2009/10/18 23:23
Leave a Comment
[로그인][오픈아이디란?]


연산군이 상식을 뛰어넘고 윤리를 파괴하는 악행을 계속하자 여기저기서 왕을 비방하는 말이 많았다. 고금의 모든 독재자들의 공통점 가운데 하나는 건전한 비판조차 싫어하는 것인데 연산도 예외가 아니었다. 1505년 1월 12일 「연산군 일기」에 나와 있는 연산의 지시를 보자.

 
왕에 관한 일은 입으로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이따금 변변치 못한 무리가 있어 자주 불온한 말을 내니 징계하지 않을 수 없다. 앞으로 이러한 자가 있거든 당사자는 마디 내어 베어 죽이고, 부자·형제는 참형에 처하고, 같은 성이나 다른 성을 가진 사촌은 남녀를 가리지 않고 모두 곤장형에 처하며 온 가족을 변방으로 내쫓아라.

 
그러나 이런 명령으로도 사람들의 입을 막을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얼마 뒤인 1월 29일에는 그 동안 내시들에게 채웠던 팻말을 조정에 드나드는 관리들에게도 차게 했다. 이름하여 신언패(愼言牌 : ‘말조심 팻말’)였다. 이 신언패엔 어떤 말이 새겨져 있었을까?


입은 화를 가져오는 문이요       
혀는 내 몸을 베는 칼이니                
입을 다물고 혀를 깊이 간직하면  
몸이 편안해 곳곳이 안온하리라.  

口是禍之門 
舌是斬身刀
閉口深藏舌 
安心處處宇

<노회찬과 함께 읽는 조선왕조실록, 도서출판 일빛, 2004>

이올린에 북마크하기
2009/10/18 22:55 2009/10/18 22:55
Leave a Comment
[로그인][오픈아이디란?]

 

자신의 생모인 폐비 윤씨가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고 생각한 연산군이 무수한 사람들을 죽이면서 벌인 복수극이 바로 갑자 사화다. 이 일이 있은 뒤 연산의 광폭한 행동은 더욱 심해졌으니, 특히 사람 죽이는 일과 마시고 노는 일에서 더욱 그러했다. 갑자 사화 이듬해인 1505년 10월 2일의 「연산군 일기」에도 이렇게 적고 있다.

갑자년 이후의 하교가, 흥청·운평에 관한 일이 아니면 반드시 사람을 벌하고 죽이는 일이라, 인심이 날로 떠났다.

그러면 흥청과 운평은 어떤 사람들인가? 연산은 대신들을 전국 각지에 채홍사로 보내 사대부의 첩과 양인의 아내와 딸, 노비, 창기 들을 가리지 않고 징발했는데 그 수가 1만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들을 운평·계평·채홍·속홍·부화·흡려 따위의 호칭으로 불렀으며 이들 가운데 나은 자를 골라 흥청이라 했다.
이런 이름들은 연산이 직접 지었는데, 흥청이란 사악하고 더러운 것을 깨끗이 씻으라는 뜻이며, 운평이란 태평한 운수를 만났다는 뜻이다. 흥청 가운데 왕과 관계를 갖지 못한 자는 지과라 하고, 관계를 가진 자는 천과라 하며, 관계를 가졌으되 흡족하지 못한 자는 반천과라 했다.

이들 왕실 소속 기생들을 위해 모두 일곱 군데에 거처할 시설을 지었다. 또한 음식 공급을 위해 호화고를 두었고, 의복과 화장품 공급을 위해 보염서를 설치했다. 이 어마어마한 규모의 왕실 기생을 유지하기 위한 비용은 모두 백성들이 부담했으니 불평 불만의 소리가 높을 수밖에 없었다. 흥청·운평에 대해 험담하는 자들을 잡아들이라는 명령까지 따로 내릴 정도였다. 또 이들 기생 가운데 곱게 화장하지 않은 자는 귀양을 보내고 그의 부모까지 처벌하도록 했다. 아이를 가질 경우 그 남편은 목을 베고 아이는 생으로 매장하게 했다.

연산이 서울 근교로 놀러 갈 때 왕을 따르는 흥청의 수가 1천 명씩 되었고 날마다 계속되는 파티에도 이들 흥청과 운평이 동원되었다. 연산의 이러한 행각으로 ‘흥청’은 ‘흥청거리다’는 말을 낳았고 오늘날의 ‘흥청 망청’으로 이어졌다.
연산은 말 그대로 흥청 망청의 원조라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흥청의 본래 뜻이 ‘사악하고 더러운 것을 깨끗이 씻으라’는 뜻임을 생각할 때, 연산에게는 좋은 말 하나를 변질시켰다는 죄목이 추가되어야 할 것이다.

<노회찬과 함께 읽는 조선왕조실록, 도서출판 일빛, 2004>

이올린에 북마크하기
2009/10/18 22:18 2009/10/18 22:18
Leave a Comment
[로그인][오픈아이디란?]

 

내시란 궁중에서 일하는 거세된 남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내관 또는 환관이란 말로도 일컬어졌다. 조선 시대의 내시는 100∼150명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이들은 주로 지금의 경복궁 옆 효자동에 모여 살았다. 그래서 원래 이 동네 이름이 화자동(火子洞)이었다고 한다. 고려 시대에는 내시들이 권세를 누리는가 하면 심지어는 최만생처럼 공민왕을 살해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그 결과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는 내시들의 행동이 엄격한 통제 아래 놓이게 된다.
그러나 엄격한 통제에도 틈은 있는 법, 내시들의 탈법과 비행은 심심찮게 일어났다. 연산 10년(1504)에는 내시 한 명이 간통죄로 처벌되는 기이한 일이 일어났다. 곧 내시 서득관이 잠실(누에고치 작업장)을 감독하다가 잠모(누에고치를 기르는 여자)와 사통했는데, 그녀의 남편이 고소한 것이다.
마땅히 고자여야 할 내시가 간통죄를 저지르자 내시들에게 일제히 고자 검사를 받게 했다. 이 검사에서 또 한 명의 내시가 적발되었는데 바로 김세필이다. 연산 10년 5월 3일 왕은 처벌을 명했다.

내시 김세필은 음신이 아직 남았는데도 속이고 내시 중에 끼었으니 칼을 씌워 가둬라. 그리고 그 수양 동생 이세륜과 수양 사촌 및 수양 아비 최결과 최결의 수양 동생 김만수 들은 모두 잡아다 빈청(궁궐 안의 관청)에서 국문하되, 그 사실을 알았는지 조사하라.
 
스스로 방탕하기 그지없는 생활을 하고 있었으면서도 연산군은 추상 같은 처벌을 내렸다. 곧 “내시 김세필을 잡범의 예에 따라 문밖에서 형벌하라”고 한 것이다. 의금부에서 심문한 내용을 써서 보고하자, “무릇 의심스러운 죄라면 초심·재심하고 삼심까지도 할 것이나, 이 일은 명백해 의심할 것이 없으니 속히 형벌하라”고 했다.
처벌은 김세필에서 끝나지 않았다. 김세필의 수양 아비인 내시 최결도 목이 베였다. 5월 28일 최결을 처형하라 명하면서 연산군은 이렇게 지시했다.

내시들에게 보인 뒤 머리를 매달되, “고자 아닌 자를 데려다 양자로 삼아 속여 내시가 되게 한 죄”라는 푯말을 붙여라.

폭군으로 이름난 연산군이 아니었더라도 고자 아닌 내시는 처형되었을 것이다. 권력의 집중이 인격의 집중과 함께 이뤄졌던 시절에 흔히 있었던 비극적 일화이기도 하다.
절대 왕권 아래 비운의 직업이었던 내시 제도는 1894년 갑오경장에 따른 개혁 조치로 사라졌다. 그러나 권력이 분산되고 모든 삶의 인격이 동등하게 인정되는 데는 더욱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이 일은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

<노회찬과 함께 읽는 조선왕조실록, 도서출판 일빛, 2004>

이올린에 북마크하기
2009/10/18 22:14 2009/10/18 22:14
Leave a Comment
[로그인][오픈아이디란?]

 

광해군은 선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왕이 된 광해군을 기다리는 것은 임진 왜란으로 피폐해진 나라 경제, 중국 대륙에서 새로이 발흥하는 후금 세력과 명나라 사이의 패권 전쟁을 앞두고 고조되는 국제적 긴장, 세자 시절부터 시작되어 왕위에 오른 뒤에도 계속되는 배다른 왕자들의 왕권 찬탈 음모 따위였다. 광해군은 후금과 명나라의 세력 관계를 이용한 등거리 외교와 부국 강병책으로 후세의 역사가들로부터 실리주의자, 현실주의자, 개혁가의 칭호를 받고 있다. 그러나 계모와 형제들을 처단하는 악역을 감수했는데도 계속되는 역모로부터 왕위를 지켜 내지 못했다.
1623년 3월 13일, 과거에 역모에 연루된 혐의로 대비에서 폐출된 인목 대비는 이 날 인조 반정을 일으킨 무리들에게 말한다.

먼저 이혼(광해군) 부자의 머리를 가져와서 내가 직접 살점을 씹은 뒤에야 책명을 내리겠다.

그러자 신하들은 “예로부터 왕을 내쫓고 가둔 일은 있어도 죽이지는 않았다”며 인목 대비를 진정시켰다. 이렇게 해서 광해군의 유배 생활이 시작되었다. 1623년 왕위에서 쫓겨난 광해군은 18년이나 더 살다가 1641년 66살로 세상을 하직했다. 연산군이 중종 반정으로 물러난 뒤 2개월만에 강화도에서 30살의 나이로 숨을 거둔 데 비해 꽤 오래 수를 누린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왕위에서 물러난 광해군의 여생이 행복했던 것은 아니다. 사실은 정반대였다.
광해군은 처음에는 연산군과 마찬가지로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강화도에서 광해군의 아들과 며느리는 자결하고 부인은 병으로 죽었다. 홀로 남은 광해군의 유배 생활은 전혀 편할 수 없었다. 인조 반정으로 집권한 세력들은 왕권이 불안정하자 광해군을 살해하려는 시도를 자주 했다.
1624년 이괄의 난이 발생하자 광해군이 다시 왕위에 오를 가능성을 경계한 인조는 광해군을 태안으로 유배시켰다가 사태가 진정되자 다시 강화도에 보냈다. 1636년 병자 호란이 일어나고 청나라에서 광해군의 원수를 갚겠다고 하자 다시 강화도의 북서쪽에 있는 교동도로 유배지를 옮겼다. 그러다가 난리가 끝나자 후환을 막을 셈으로 교동도에 있는 광해군을 제주도로 유배 보냈다. 1641년 7월 1일 광해군은 제주도에서 위리 안치(집안에 가두고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함)된 가운데 죽었는데, 그의 나이 67살이었다.
광해군이 죽자 제주 목사로 있던 이시방이 즉시 열쇠를 부수고 들어가 예를 다해 염을 했는데, 나중에 조정의 ‘충신’들은 이시방의 행동을 ‘잘못된 일’로 규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광해군의 사망 소식을 실은 1641년 7월 10일의 「인조 실록」은 광해군이 교동에서 제주로 옮겨 갈 때에 지은 시 한 편을 소개하며 “이 때 듣는 자들이 모두 비감에 젖었다”면서 죽은 자를 위로하고 있다.

부는 바람 뿌리는 비 성문 옆 지나는 길
후덥지근 장독 기운 백 척으로 솟은 누각
창해의 파도 속에 날은 이미 어스름
푸른 산의 슬픈 빛은 싸늘한 가을 기운
가고 싶어 왕손초를 신물나게 보았고
나그네 꿈 자주도 제자주에 깨이네
고국의 존망은 소식조차 끊어지고
연기 깔린 강 물결 외딴 배에 누웠구나

<노회찬과 함께 읽는 조선왕조실록, 도서출판 일빛, 2004>

이올린에 북마크하기
2009/10/18 22:11 2009/10/18 22:11
Leave a Comment
[로그인][오픈아이디란?]

 

조선 시대에는 두 번의 반정이 있었는데 연산군을 폐한 중종 반정과 광해군을 폐한 인조 반정이 그것이다. 반정이란 원래 발란 반정(撥亂反正)이란 말을 줄여 쓴 것이다. 곧 난세를 평정해 정상을 회복한다는 뜻이다. 「태조 실록」에서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을 발란 반정으로 표기하고 있는 것도 같은 뜻이다. 그래서 반정은 평화적인 왕권 교체가 아닌데도 정당성을 인정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연산군을 쫓아 낸 중종 반정과는 달리 광해군을 몰아 낸 인조 반정은 후세의 사가들에게 그 명분과 정당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과 관련해 계엄 사령관을 조사할 일이 있다”며 일으킨 12·12 사태가 결국 ‘일부 군인들의 권력 장악을 위한 불법 쿠데타’였던 것처럼, 인조 반정의 명분과 실제는 달랐다는 것이다.
인조 반정을 일으킨 세력들은 반정의 명분으로, 인목 대비를 폐하고 형제들을 제거한 광해군의 폭정과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저버린 점을 들고 있다. 그런데 광해군이 선조에 의해 세자로 책봉되는 과정과 그 뒤 왕위에 오르는 과정뿐 아니라, 왕이 된 이후에도 끊임없이 왕권 찬탈을 위한 모반 사건이 줄지어 일어났다. 더구나 왕의 형제들도 이런 모반에 연루되어 처벌받았기 때문에 이는 반정의 명분이 되기 어려웠다. 또한 차츰 약해져 가던 명나라 세력과 새롭게 커져 가는 후금(뒤에 청나라) 세력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며 실리에 따른 외교 노선을 구사하던 광해군의 정책을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배신하는 것으로 여기는 것 역시 반정의 명분은 될 수 없었다. 그것은 반정을 일으킨 세력들이 명나라에 지나치게 굴종하면서 청나라에 대항하다가, 결국 정묘 호란과 병자 호란 때 굴욕스런 항복을 한 사실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될 수 없다”는 주장이 있듯이, ‘성공한 반정’인 인조 반정으로 집권한 세력들은 광해군을 폭군으로 그려 냈고 이는 「인조 실록」에 반영되었다.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될 수 없다” 는 단호했던 검찰의 입장은, 비자금 사건으로 전직 대통령이 구속되고 여론이 악화되자 슬그머니 처벌이 가능하다는 입장으로 선회했다. 마찬가지로 ‘성공한 반정’인 인조 반정도 당대에는 성공을 거두었지만 후세의 역사가들로부터는 혹독한 비판을 면치 못하고 있다. 반정의 명분이 없었음은 물론 반정으로 집권한 세력들이 나라를 망치고 백성들에게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안겨 주었다는 것이다.

 



이올린에 북마크하기
2009/10/18 22:04 2009/10/18 22:04
Leave a Comment
[로그인][오픈아이디란?]

 

태조와 태종, 세조와 세종, 인조와 인종, 정조와 정종, 순조와 순종 들은 자칫 혼동하기 쉬운 조선 왕들의 이름이다. 이런 이름을 지을 때 조(祖)와 종(宗)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가? 일반적으로 창업을 한 왕에게는 ‘조’ 자를 붙이고 수성을 한 왕에게는 ‘종’ 자를 붙인다고 알려져 있다. 그래서 ‘조’가 ‘종’보다 격이 더 높은 것처럼 이해되고 있기도 하다.

조선 왕조의 27명의 왕 중에서 ‘조’ 자를 쓴 왕은 태조·세조·선조·인조·영조·정조·순조 해서 모두 7명이다. 태조는 이씨 왕조를 창건했기에 말 그대로 태조가 되었다. 반면 나머지는 모두 나라를 중흥시키거나 큰 국란을 극복하거나 혹은 반정을 통해 왕이 된 경우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조’와 ‘종’의 이러한 구분이 정확한 평가에 기초한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 실제 영조·정조·순조의 경우는 처음에 각각 영종·정종·순종으로 추서되었다가 나중에 다시 고쳐 부르게 된 이름이다. 따라서 태조를 제외하면 나머지 왕들의 이름에 붙는 조와 종은 격의 높고 낮음에 따른 것이 아니라, 그때 그때의 상황에 따랐다. 다만 분명한 것은 왕위를 박탈당해 왕자의 위치로 격하된 왕들의 경우에는 결코 조나 종을 붙이지 않았다. 연산군이나 광해군은 바로 왕자의 호칭이다.



이올린에 북마크하기
2009/10/18 22:00 2009/10/18 22:00
Leave a Comment
[로그인][오픈아이디란?]

 

1506년 8월 14일 연산군은 사관에게 시정(時政)만 기록하고 자신의 사생활은 기록하지 못하도록 지시했다.

『춘추』에 이르기를 ‘어버이를 위하는 자는 꺼리어 숨기고 피한다(爲親者諱)’ 했으니, 사관은 시정만 기록해야지 임금의 일을 기록하는 것은 마땅치 못하다. 요즈음 사관들은 임금의 일이라면 남김없이 기록하려 하면서 아랫사람의 일은 숨기고 피해 쓰지 않으니 죄가 또한 크다. 이제 이미 사관에게 임금의 일을 쓰지 못하게 했으나 아예 역사가 없는 것이 더욱 낫다. 임금의 행위는 역사에 구애될 수 없다.

고려 예왕(睿王)이 지은 시에 이르기를,

“이 때 한 잔 술이 없다면 울적한 생각을 어찌 씻으랴” 했으니, 호탕하고 거리낌없기 이를 데 없다. 진나라 황제가 “눈과 귀가 좋아하는 바를 다하고, 마음과 뜻이 즐거운 것을 다한다”고 말한 것을 후세에 모두 잘못되었다 하지만 그렇게 못할 것이 없다. 또 옛날 급암이 한나라 무제에게 말하기를 “(한나라 무제가) 속에 욕심이 많으면서 겉으로만 인의(仁義)를 베푼다”고 했는데, 급암이 아무리 고지식할지라도 임금 앞에서 이렇게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만약 죄 주기로 한다면 간신들보다 앞서야겠는데, 경들의 생각은 어떤가?

이에 대해 승지 강혼은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춘추』는 공자가 쓴 것인데, 노(魯)나라는 부모의 나라이므로 ‘어버이(어버이란 곧 왕을 가리킨다)를 위하는 자는 꺼리어 숨기고 피한다’고 한 것입니다. 역사를 쓰는 사람은 마땅히 사실에 의거해 바르게 쓰되, 시정을 기록할 뿐 임금의 일을 쓰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예왕은 시문을 짓고 읊는 풍류의 도를 좋아해 늘 곽여와 더불어 읊고 화답하되, 시사(詩辭)가 아주 호탕하고 거리낌없었으니, 그러는 것이 무슨 해로움이 있겠습니까. 급암의 말은 과연 옳기는 했지만 너무 지나쳤기 때문에 무제가 “심하도다, 급암의 고지식함이여”라고 탄식한 것입니다. 고지식하다는 것은 곧 어리석고 곧다는 뜻이니, 전하의 가르침이 지당하십니다.

연산군은 왕의 행위는 역사에 구애될 수 없으니 왕의 일을 기록하지 말라고 했으나, 이 말이야말로 역사를 의식한 말이다. 포악한 행동을 거침없이 한 연산군이었지만 자신의 행동이 역사에 기록되어 남는 것은 피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연산군의 지시가 있었는데도 많은 기록과 목격담이 남아 그의 비행을 오늘까지 전하고 있다. 역시 손바닥으로 해를 가리는 것만큼 어려운 일은 없는 법이다.



이올린에 북마크하기
2009/10/18 21:20 2009/10/18 21:20
Leave a Comment
[로그인][오픈아이디란?]

 

연산군 11년(1505) 11월 7일, 연산군의 총애를 받던 장녹수의 위세가 하늘을 찌를 때였다. 연산군의 유흥을 위해 동원된 기생 중에서도 하급인 운평에 속하는 옥지화라는 기생이 연산의 후궁인 장녹수의 치마를 밟은 ‘사건’이 발생했다. 장녹수가 연산에게 일렀는지 왕은 신하를 불러 모아 옥지화를 처벌토록 했다. 그러자 영의정·좌의정·좌찬성·우찬성, 각조 판서와 대사헌까지 나서서 옥지화의 죄가 참으로 크니 참형에 처해야 한다고 이구 동성으로 진언했다. 이 말을 들은 연산의 답변이 걸작이었던지 「연산군 일기」는 이를 그대로 기록하고 있다.

아주 천한 것이 질그릇이나 이것으로 요강을 만든다면 진실로 천하지만, 만약 어전에 쓸 물건을 만든다면 천하게 여길 수 없다. 옥지화와 같은 운평(하급 궁중 기생)이 숙용(종3품 후궁)이나 숙원(종4품 후궁)에 대해 감히 저와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해 조금이라도 능멸함이 있다면 불경하기가 그지없으니, 이런 사람이 있으면 마땅히 벌로 다스려야 한다.
 
노비 출신이었던 장녹수를 염두에 둔 말이다. 옥지화는 치마 한 번 밟은 죄로 결국 목이 베어졌다.

 



이올린에 북마크하기
2009/10/18 21:00 2009/10/18 21:00
Leave a Comment
[로그인][오픈아이디란?]
블로그이미지
About
노회찬

자유인,문화인,평화인 진보신당 대표 노회찬

Recent Trackback

266092
Today : 107   Yesterday : 4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