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실록은, 조선 태조 때부터 철종에 이르기까지 25대 472년 동안의 기록을 담고 있다. 이를 일컬어 『조선 왕조 실록』이라 부른다. 오늘날 국보 151호로 지정되어 있다.
한편 1907년 일본과 친일 세력의 강요로 왕위에서 물러난 고종과, 1910년 한일 합방으로 물러난 순종의 실록은, 일본인들이 1935년에 만들었다.
『조선 왕조 실록』의 원본은 한문으로 쓰여졌는데 모두 1,893권에 이른다. 1993년에 완료된 한글 번역본(한국판)은 모두 413권이다. 이 한글 번역본을 단 3장의 디스크에 담은 CD-ROM 타이틀이 1995년에 출판되기도 했다.
『조선 왕조 실록』은 우선 그 양이 방대한 만큼, 조선 시대의 사정을 가장 풍부하게 알려 준다. 물론 왕과 조정을 중심으로 기록했기 때문에, 백성들의 밑바닥 삶을 제대로 담아 내지 못한 근본적인 한계를 갖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역대 왕조의 기록을 이만큼이나마 집대성했다는 의미에서 중요한 문화 유산이 아닐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 왕조 실록』은 오늘날 많은 역사가들과 문학가들에게 연구와 창작, 그리고 상상력의 보고로 애용되고 있는 것이다.
『조선 왕조 실록』은 시대순으로 그리고 날짜별로 기록되어 있는데, 가장 큰 특징은 그것이 형식적인 일지가 아니라는 점이다. 무엇보다도 사실을 객관적으로 기록한다는 취지에 따라, 왕이 승하한 뒤 후대에 완성토록 했다. 그러니까 자신의 실록을 본 왕은 있을 수 없었다.
한편 사관을 두어 왕의 언행을 가까이에서 기록해 사초로 남기게 했다. 이 사초는 나중에 실록을 작성할 때 중요 자료가 되었다. 따라서 이 사초 또한 왕이 볼 수 없는 것이 원칙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미 만들어진 선대 왕의 실록을 보는 것도 금지되었다. 조선 초기에 실록과 사관 제도를 정립하는 과정에서나, 연산군과 같은 폭군의 재위 때에는, 실록과 사초의 열람 금지 원칙이 다소 시련을 겪기도 했다.
태조 1년(1393) 3월 23일 왕과 신하들의 대화는 사관에 대한 왕의 인식 변화를 짐작케 한다.
임금이 신하들에게 물었다.
“어제 사냥하는 곳에 사관이 따라온 것은 무슨 까닭인가?” 모두 대답했다. “사관의 임무는 그때 그때 일어난 일들을 기록하는 것입니다. 하물며 임금의 거동이겠습니까?” 한 신하가 앞으로 나아가서 말했다. “임금은 구중 궁궐에 있으니 날로 경계심이 풀리고 날로 게으른 마음이 생겨납니다. 그래도 누가 말릴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임금은 오직 하늘과 역사를 두려워할 뿐입니다.” 임금이 말했다. 신하가 대답했다. “하늘은 형상이 없으나, 착한 것은 복을 주고 음란한 것은 화를 줍니다. 또한 역사는 정치의 좋고 나쁜 것과 행동의 잘잘못을 곧게 기록하고 만세에 전하니, 효자나 자손이 마음대로 고치지 못합니다. 그러니 두려운 일이 아닙니까?” 임금이 말했다. “그렇다.” 신하가 또 말했다. “비록 사관에게 임금을 뵙지 못하게 한다 하더라도, 다섯 승지가 모두 춘추관을 겸하기 때문에 임금의 모든 일거수 일투족을 기록합니다.” 임금이 처음에는 그것을 알지 못하고, 늘 가까이 있기 때문에 자못 소홀히 여겼다. 그러나 이 때부터 언행을 더욱 겸손하고 조심스럽게 했다. 비록 사관 제도를 받아들인다 해도, 늘 가까이에서 자신의 언행을 빠짐없이 사초에 기록하는 사관은 왕에게 부담스러운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왕 가까이 두 사람의 사관을 두어 좌측의 사관은 왕의 행동을, 그리고 우측의 사관은 왕의 발언을 기록했다. 이 같은 제도는 세종 때부터 시행된 것이다. 조선 시대 왕들의 사관에 대한 태도는 조금씩 다르지만, 가장 대조적인 경우는 세조와 연산군이다. 세조 2년(1457) 8월 23일의 기록을 보자. 왕이 사정전에 나아가니, 화천군 권공·우승지 조석문·좌부승지 윤자운·우부승지 한계미·동부승지 권지·승문원 교리 홍일동·사관 김이용 들이 왕을 모셨다. 왕이 김이용에게 술을 올리도록 명하고 말했다. “나의 잘못하는 바를 네가 지적할 수 있느냐?” 김이용이 대답했다. 임금이 조석문을 돌아보며 말했다. “사관의 말에 대한 너의 생각이 어떠하냐?” “위로 공경(公卿)으로부터 아래로 모든 집사관에 이르기까지 누구나 임금의 잘못을 다 말할 수 있습니다.” 임금이 말했다. “승지의 말이 옳다. 사관이 실언한 듯하다.” 임금이 술로써 벌을 주라고 명하고 말했다. “나의 잘잘못은 만인의 눈이 지켜 보는 것이니 숨길 수 없다. 사관은 마땅히 사실대로 자세히 기록해야 한다. 앞으로는 내가 무술을 배울 때에 반드시 사관을 두 사람 갖추어라. 한 사람에게 사고가 생기면 미처 자세히 기록하지 못할까 염려하는 것이다. 너희 승지들 또한 반드시 다 기록하라. 일을 기록하는 우리 나라 글이 중국의 글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다만 사실을 빠뜨리지 말고 글을 만들되, 서툰 것은 꼭 염려할 것이 아니다.” 한편 연산군의 태도는 거칠 것 없는 세조의 태도와 상반되었다. 연산군 12년(1506) 7월 9일의 「연산군 일기」에 나오는 왕의 발언을 들어 보자. 임금이 하는 일을 기록하지 않을 수는 없다. 하지만 하늘이 하는 바를 어찌 사람이 논할 수 있으며, 임금이 하는 일을 어찌 신하가 시비할 수 있겠는가. 옛말에 이르기를 “글을 다 믿는다면 글이 없는 것만 못하다”고 했다. 그러므로 『춘추』에 기록된 글 또한 다 믿을 수 없다. 그래서 전에 이미 사관에게 임금의 과실은 기록하지 못하게 했노라. 「선조 실록」은 광해군 때 북인들이 권세를 잡았을 무렵 만들어졌다. 그런데 북인들을 일방적으로 좋게 기록했다고 해, 나중에 권세를 잡은 서인들이 이번에는 그들의 관점을 살려 「선조 수정 실록」이라는 개정판을 낸 일이 있었다. 또한 「단종 실록」, 「연산군 일기」, 「광해군 일기」 같은 쫓겨난 왕의 실록은, 쫓아 낸 왕의 재위 기간에 만들었기 때문에 전대 왕에 대해 편파적으로 기록할 가능성도 없지 않았다. 그런데도 수많은 견제와 경계 속에서 사초는 작성되었고, 『조선 왕조 실록』은 완성되어 갔다. 이처럼 『조선 왕조 실록』은 비행기의 블랙 박스와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1983년 소련 영공에서 KAL 항공기 한 대가 소련 전투기에 격추되어, 몇백 명의 인명이 차가운 사할린 앞바다에 떨어졌다. 왜 KAL 기가 소련 영공을 장시간 비행했는지, 소련 전투기는 이 비행기가 비무장 민간 항공기임을 알았는지, 또한 사전 경고는 없었는지 하는 사건의 실상은, 15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비행기의 항로 변경과 조정기 조작 상황 그리고 조종사들 사이의 대화 기록 따위를 담은 블랙 박스가 발견되지 않았기때문이다. 이 블랙 박스가 발견되지 않는 한, 이 사건의 진실은 영원히 묻혀질지도 모른다. 반면 오늘날 우리가 이만큼이라도 조선 왕조 오백 년의 진실을 알 수 있는 것은, 조선 왕조의 블랙 박스인 『조선 왕조 실록』이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대통령은 조선 시대의 왕보다 권한이 더 작고 재임 기간도 더 짧다. 그래서 정권도 몇 차례 바뀌었지만 우리에겐 실록도 없고 사관도 없다. 말하자면 이 시대에는 블랙 박스가 없는 것이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비리니 의혹이니 특별 검사제 도입이니 하는 소리가 높다. 또한 청문회가 열리고 전직 대통령이 구속까지 되는 사태가 일어나지만, 진실이 다 밝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이러한 혼란은 『조선 왕조 실록』과 같은 블랙 박스가 없기 때문이 아닐까? 청와대에는 대통령의 공식 일정과 주요 발언을 기록하는 통치 사료 담당관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담당관이 작성한 ‘통치 사료’는 대통령이 퇴임할 때 가져가는 기념품일 뿐이다. 또한 통치 사료 담당관이 조선 시대의 사관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도 물론 아니다. 만일 조선 시대처럼 사관이 있어서 대통령의 일거수 일투족을 기록하고 사초를 작성한다면 어떨까. 그러면 우리는 비리니 국정 조사니 하여 사회 전체가 떠들썩해지는 혼란을 피하고 차분히 진실을 대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사관이 지키고 서 있다면, 의혹을 살 일은 처음부터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드물기 때문이다. 역대 정치사의 많은 잘못들은, 국민은 물론 역사마저도 속일 수 있다는 만용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그래서 『조선 왕조 실록』은 오늘의 우리에게 충고하고 있다. “너희도 실록을 써라!”
“왜 그런가?”
“옳은 말로 충고를 드리는 것은 소신의 임무가 아니기 때문에, 황공해 말을 못 합니다.”
조석문이 대답했다.
<노회찬과 함께 읽는 조선왕조실록, 도서출판 일빛, 20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