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 13년(1431) 10월 15일 왕은 궁중에서 하는 불꽃놀이를 때마침 와 있던 중국 사신에게 보여 줄 것인지 신하들에게 물었다. 많은 신하들이 “사신이 보기를 요청하면 이를 보여 줄 것이요, 요청하지 않으면 이를 보여줄 필요가 없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찬성을 지내던 허조가 말했다.
화약은 한정되어 있는데 불꽃놀이에 허비되는 것이 아주 많습니다. 더구나 우리 나라의 화약은 그 맹렬함이 중국보다도 낫습니다. 그러므로 이를 중국 사신에게 보여 주어서는 안 됩니다. 저들이 비록 요청하더라도 마땅히 보여 주지 마십시오.
조선 초기에는 해마다 연말 연시가 되면 궁중에서 불꽃놀이를 벌여 송구 영신을 기리는 풍습이 있었다. 연말이 되자 이 불꽃놀이를 중국 사신들에게 보일 것인지 다시 논의가 일었다. 허조는 계속 반대했다. 12월 24일의 「세종 실록」을 보자.
“염초(화약 원료)를 구워 내는 것은 많은 노력이 들어, 한 해 동안에 1,000여 근밖에 구워 내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불꽃놀이 한 번 하는 데 화약을 아주 많이 허비하고 있습니다. 원하건대 지금부터는 비록 사신이 불꽃놀이를 보고자 하더라도, 잠깐 동안만 설치해 화약이 아주 귀하다는 것을 보여야 합니다.”
그러자 임금이 말했다.
“염초는 지방에서 구워 내는 것을 제외하면 1년에 1,000근이 되지 않으니 아주 귀한 편이다. 사신이 불꽃놀이를 보는 것은 다만 화약을 허비하는 문제만 있는 것이 아니다. 만일 중국에 변이 생기면, 아무리 조선의 화약이 귀하다고 해도, 이를 청구해 오면 처리하기가 아주 어려울 것이다. 이것이 두려운 일이다. 경의 말이 아주 옳으니 내가 아주 기꺼이 받아들이겠노라.”
이처럼 중국 사신에게 불꽃놀이를 감추려 했을 정도로 조선 화약의 성능은 중국보다 앞섰다. 원래 화약은 페르시아인들의 발명품이다. 이것이 몽고를 거쳐 중국으로 들어간 것이다. 우리 나라의 화약 제조법은 중국에서 배운 것이니만큼, 그 성능이 앞섰다는 것은 역설이며 또 그만큼 통쾌한 일이다.
중국에서 화약 제조법을 배운 사람은 고려말의 최무선이다. 「태조 실록」에 따르면 그는 천부적으로 기술에 밝고 방법과 계략이 많으며, 군사 방법에 대해 말하기 좋아했다. 고려 시대에 최무선의 벼슬은 문하 부사에까지 이르렀다. 그가 화약에 관심을 가진 것은 “왜구를 누르는 데는 화약만한 것이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태조 4년(1396) 4월 19일 최무선의 죽음을 다룬 「태조 실록」에는 그가 화약을 만들기까지 들인 노력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국내에 아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최무선은 항상 중국 강남에서 오는 상인이 있으면 곧 만나 보고 화약 만드는 법을 물었다. 한 상인이 대강 안다고 대답하므로, 자기 집에 데려다가 의복과 음식을 주고 몇십 일 동안 물어서 대강 요령을 알았다. 그 뒤 의정부에 시험해 보자고 말했으나, 모두 믿지 않고 최무선에게 거짓말한다고 험담까지 했다.
그러나 최무선은 여러 해를 두고 의견을 올렸다. 마침내 그 성의에 감동해 화약국을 설치하고 최무선을 제조 책임자로 삼아 드디어 화약을 만들어 내게 되었다. 그 화포는 대장군포·이장군포·삼장군포·육화석포·화포·신포·화통·화전·철령전·피령전·질려포·철탄자·천산오룡전·유화·주화·촉천화 따위 이름이 있었다. 기계가 만들어지자 보는 사람마다 모두 놀라고 감탄했다. 또 전함을 연구해 의정부에 말해서 모두 만들어 냈다.
경신년 가을에 왜선 3백여 척이 전라도 진포에 침입했을 때 조정에서는 최무선의 화약을 시험해 보고자 했다. 그리하여 최무선을 부원수에 임명하고 도원수 심덕부, 상원수 나세와 함께 배를 타고 화포를 싣고 진포에 이르렀다. 왜구는 화약이 있는 지 알지 못하고 배를 한 곳에 집결시켜 힘을 다해 싸우려고 했다. 그러자 최무선이 화포를 발사해 그 배를 모두 태워 버렸다. 배를 잃은 왜구는 육지에 올라와서 전라도와 경상도까지 노략질하고 운봉에 모였는데, 이 때 태조가 병마 도원수로서 참가해 여러 장수들과 함께 왜구를 한 놈도 빠짐없이 섬멸했다. 이 때부터 왜구가 차츰 줄어들고 항복하는 이가 서로 잇달아 나타나서, 바닷가의 백성들이 생업을 회복하게 되었다.
조선이 개국한 뒤에 최무선은 늙어서 현역으로 일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태조 이성계는 그의 공을 생각해 직접 검교 참찬(명예 참찬, 정2품)이라는 벼슬을 내렸다.
이처럼 조선 초기부터 화약의 중요성은 각별하게 생각되었으며 화약의 제조·보관·사용 및 보안에 관한 왕들의 관심도 아주 컸다. 그 가운데서도 세종 대왕은 특히 화약에 관심이 많았다. 세종 8년(1426) 12월 13일에는 영동의 해안 고을에서는 화약 재료인 염초를 굽지 못하도록 지시했다. 염초를 제작하는 방법이 일본으로 전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또 세종 13년(1431) 10월 15일에는 군기감(각종 병기의 제작·보관을 담당하는 부서)의 화약 창고를 다른 건물이 없는 너른 땅으로 옮기도록 했다. 민가와 화약 창고가 같이 있으면 화재가 일어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었다.
군대의 화약 사용을 얼마나 중요시했는가는 세종 28년(1446) 1월 26일의 「세종 실록」에 상징적으로 나타나 있다. 곧 이 날 의정부를 통해 병조에 내린 지시에 따르면, 군기감에서 근무해 화약 다루는 기술을 익힌 사람은 그만둔 뒤에도 소재를 파악해 위급할 때에 동원할 수 있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또 그 사람이 살고 있는 지역의 관리에게 불시에 점검하도록 하고 먼 지방으로 왕래하는 것을 삼가하도록 지시했다. 요즘으로 치면 일종의 동원 예비군, 그 가운데서도 특수 병과 출신의 동원 예비군 같은 제도였다.
국방 예산이 전체 예산의 3분의 1이 넘는데도, 첨단 무기의 국산화가 지지 부진한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그리하여 우리 나라는 세계 무기 시장에서 첨단 무기의 주요 수입국으로 각광받고 있다. 하지만 각 나라의 이해가 걸린 최첨단 무기는 돈 주고도 사 올 수 없는 형편이다. 중국 사람에게서 화약 제조법을 배웠으나 더 우수한 화약을 만들어 낸 최무선과, 그것을 소중히 여기고 관리·발전시킨 세종 대왕. 오늘날의 그들은 어디에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