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0년 4월 26일의 「세종 실록」은 이렇게 전한다.

 
왕은 그의 친형인 양녕 대군에게 얼음을 내려 주되, 날마다 한 덩어리씩 음력 5월에서 7월까지 내려 주고, 그 뒤로는 그치게 했다.

 
냉장고도 없던 시절에 웬 얼음인가? 인공으로 얼음을 만들 수 없었던 그 무렵에는 입춘 전 무렵에 한강의 얼음이 4∼5척 이상 두껍게 얼면 이를 떼어 내어 얼음 창고 속에 보관했다가 봄과 여름에 사용했다. 지금 서울시 용산구 한강변의 동빙고동과 서빙고동은 바로 서울에 위치한 두 개의 얼음 창고 이름으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동빙고는 궁중에서 제사 지낼 때 쓰일 얼음을 보관하던 창고였고, 서빙고는 궁중과 개인의 일반적인 용도를 위한 것이었다.

 
신라 시대의 경주 석빙고가 말해 주듯이 겨울에 얼음을 보관해 여름에 사용한 역사는 길다. 그러나 전기 냉장고가 없던 시절, 한여름의 얼음은 일반 백성들은 구경하기도 힘든 귀한 것일 수밖에 없었다. 벼슬아치들도 2품 이상의 고관 대작이 되어야 복날 임금으로부터 얼음 한 덩어리씩을 선사받는 터였다. 그래서 검약을 강조하던 헌종은 신하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어민들의 해산물 채취를 위한 어려움은 실로 목숨에 관계되고 여름철에 얼음에 채워 나르는 것은 더욱이 깊은 폐단이다. 따라서 이제부터는 6∼7월에 날 전복과 익힌 전복을 상납하는 것은 모두 영구히 멈추라.

 
헌종과는 달리 연산군은 최고의 사치품인 얼음을 가장 사치스럽게 사용한 왕이었다. 연산이 왕으로 즉위한 첫 해에 그는 경기 관찰사에게 지시한다.

 
약에 쓸 곰은 민폐를 끼치지 말고 잡아서, 큰 것은 가죽을 벗기고 사지를 쪼개어 가닥을 만들고, 작은 놈은 전체를 얼음에 채우고 아울러 그 가죽은 이어서 갖다 바쳐라.

 
물론 그뿐이 아니었다. 한겨울엔 산 모양으로 얼음을 조각하도록 해 놓고 이를 감상하는가 하면, 한여름 더위 속에 대비의 생일 잔치를 치르면서 무게가 각기 천 근이나 나가는 놋쟁반을 연회장 사면에 설치하고 그 위에 얼음을 놓아 두기도 했다. 천연 에어컨이었던 셈이다. 이처럼 얼음 이용법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연산은 왕으로서는 드물게 「연산군 일기」에 얼음을 소재로 한 시까지 한 수 남겼다.

 
승지들이 포도 한 송이를 따서 얼음 넣은 쟁반에 담아 왕에게 바치니, 임금이 몸소 시를 지었다.

 
“얼음 채운 파란 알이 달고 시원해
옛 그대로인 성심에 절로 기쁘네
몹시 취한 주독만 풀어 주는 것이 아니라
병든 위 상한 간도 고쳐 주겠네”

 
1504년 한여름인 7월 25일 경회루에서였다. 집집마다 냉장고가 있는 오늘날, 얼음은 사시 사철 구경할 정도로 흔한 물건이 되었다. 그러나 얼음이 흔한 대신 더 이상 조선 시대의 얼음맛을 아무도 알 수 없게 되었다. 여름에 에어컨과 선풍기를 끄지 않는 한.

<노회찬과 함께 읽는 조선왕조실록, 도서출판 일빛,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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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18 23:07 2009/10/18 2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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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살에 왕위에 오른 세종 대왕은 54살에 하직했으니 32년 동안 왕위에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늘 격무에 시달리던 세종은 40대에 들어서면서 급속히 건강이 나빠졌다. 그래서 세종은 이미 장성한 왕세자에게 결재권을 넘겨 주고 자신은 일상 업무에서 물러나기를 희망했다. 마흔 살이 되던 1436년에 왕세자의 섭정 문제를 꺼냈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양보했던 세종은 결국 1442년에 가서야 뜻을 이룬다. 만류하던 신하들을 설득할 수 있었던 것은 날로 악화되어 가던 자신의 건강 상태 때문이었다.

 
세종 21년(1439) 6월 21일의 「세종 실록」에는 마흔두 살의 세종이 말하는 자신의 병세가 기록되어 있다.

 
내가 젊어서부터 한 쪽 다리가 지나치게 아파서 10여 년만에 조금 나았는데, 또 등의 부종으로 아픈 지 오래다. 아플 때를 당하면 마음대로 돌아눕지도 못해 그 고통을 참을 수가 없다. 지난 계축년 봄에 온천에서 목욕하려 했으나, 대간에서 폐가 백성에게 미친다고 하고, 대신도 안 된다고 말하는 이가 있었다. 내가 두세 사람이 청하길래 온천에서 목욕을 했더니 과연 효험이 있었다. 그 뒤에 이따금 다시 발병할 때가 있으나, 그 아픔은 전보다 덜하다. 또 소갈증(당뇨병)이 있은 지 열서너 해가 되었다. 그러나 역시 이제는 조금 나았다. 지난해 여름에 또 임질을 앓아 오래 정사를 보지 못하다가 가을 겨울에 이르러 조금 나았다. 지난 봄 무술을 배운 뒤에는 왼쪽 눈이 아파 안막을 가리는 데 이르고, 오른쪽 눈도 어두워져서, 한 걸음 사이에서도 사람이 있는 것은 알겠으나 누구인지를 알지 못하겠으니, 지난 봄에 무술을 배운 것을 후회한다. 한 가지 병이 겨우 나으면 한 가지 병이 또 생기매 나의 노쇠함이 심하다.

 
뒷날 문종이 되는 왕세자에게 많은 업무를 이양한 뒤에도 세종의 격무는 계속되었다. 이 시절의 업적 가운데 하나가 바로 1443년 창제하고 1446년 반포한 훈민 정음이다.

<노회찬과 함께 읽는 조선왕조실록, 도서출판 일빛,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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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18 22:48 2009/10/18 2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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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13년(1431) 10월 15일 왕은 궁중에서 하는 불꽃놀이를 때마침 와 있던 중국 사신에게 보여 줄 것인지 신하들에게 물었다. 많은 신하들이 “사신이 보기를 요청하면 이를 보여 줄 것이요, 요청하지 않으면 이를 보여줄 필요가 없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찬성을 지내던 허조가 말했다.

 
화약은 한정되어 있는데 불꽃놀이에 허비되는 것이 아주 많습니다. 더구나 우리 나라의 화약은 그 맹렬함이 중국보다도 낫습니다. 그러므로 이를 중국 사신에게 보여 주어서는 안 됩니다. 저들이 비록 요청하더라도 마땅히 보여 주지 마십시오.


조선 초기에는 해마다 연말 연시가 되면 궁중에서 불꽃놀이를 벌여 송구 영신을 기리는 풍습이 있었다. 연말이 되자 이 불꽃놀이를 중국 사신들에게 보일 것인지 다시 논의가 일었다. 허조는 계속 반대했다. 12월 24일의 「세종 실록」을 보자.

 
“염초(화약 원료)를 구워 내는 것은 많은 노력이 들어, 한 해 동안에 1,000여 근밖에 구워 내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불꽃놀이 한 번 하는 데 화약을 아주 많이 허비하고 있습니다. 원하건대 지금부터는 비록 사신이 불꽃놀이를 보고자 하더라도, 잠깐 동안만 설치해 화약이 아주 귀하다는 것을 보여야 합니다.”

 
그러자 임금이 말했다.

 
“염초는 지방에서 구워 내는 것을 제외하면 1년에 1,000근이 되지 않으니 아주 귀한 편이다. 사신이 불꽃놀이를 보는 것은 다만 화약을 허비하는 문제만 있는 것이 아니다. 만일 중국에 변이 생기면, 아무리 조선의 화약이 귀하다고 해도, 이를 청구해 오면 처리하기가 아주 어려울 것이다. 이것이 두려운 일이다. 경의 말이 아주 옳으니 내가 아주 기꺼이 받아들이겠노라.”

 
이처럼 중국 사신에게 불꽃놀이를 감추려 했을 정도로 조선 화약의 성능은 중국보다 앞섰다. 원래 화약은 페르시아인들의 발명품이다. 이것이 몽고를 거쳐 중국으로 들어간 것이다. 우리 나라의 화약 제조법은 중국에서 배운 것이니만큼, 그 성능이 앞섰다는 것은 역설이며 또 그만큼 통쾌한 일이다.

 
중국에서 화약 제조법을 배운 사람은 고려말의 최무선이다. 「태조 실록」에 따르면 그는 천부적으로 기술에 밝고 방법과 계략이 많으며, 군사 방법에 대해 말하기 좋아했다. 고려 시대에 최무선의 벼슬은 문하 부사에까지 이르렀다. 그가 화약에 관심을 가진 것은 “왜구를 누르는 데는 화약만한 것이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태조 4년(1396) 4월 19일 최무선의 죽음을 다룬 「태조 실록」에는 그가 화약을 만들기까지 들인 노력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국내에 아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최무선은 항상 중국 강남에서 오는 상인이 있으면 곧 만나 보고 화약 만드는 법을 물었다. 한 상인이 대강 안다고 대답하므로, 자기 집에 데려다가 의복과 음식을 주고 몇십 일 동안 물어서 대강 요령을 알았다. 그 뒤 의정부에 시험해 보자고 말했으나, 모두 믿지 않고 최무선에게 거짓말한다고 험담까지 했다.

 
그러나 최무선은 여러 해를 두고 의견을 올렸다. 마침내 그 성의에 감동해 화약국을 설치하고 최무선을 제조 책임자로 삼아 드디어 화약을 만들어 내게 되었다. 그 화포는 대장군포·이장군포·삼장군포·육화석포·화포·신포·화통·화전·철령전·피령전·질려포·철탄자·천산오룡전·유화·주화·촉천화 따위 이름이 있었다. 기계가 만들어지자 보는 사람마다 모두 놀라고 감탄했다. 또 전함을 연구해 의정부에 말해서 모두 만들어 냈다.

 
경신년 가을에 왜선 3백여 척이 전라도 진포에 침입했을 때 조정에서는 최무선의 화약을 시험해 보고자 했다. 그리하여 최무선을 부원수에 임명하고 도원수 심덕부, 상원수 나세와 함께 배를 타고 화포를 싣고 진포에 이르렀다. 왜구는 화약이 있는 지 알지 못하고 배를 한 곳에 집결시켜 힘을 다해 싸우려고 했다. 그러자 최무선이 화포를 발사해 그 배를 모두 태워 버렸다. 배를 잃은 왜구는 육지에 올라와서 전라도와 경상도까지 노략질하고 운봉에 모였는데, 이 때 태조가 병마 도원수로서 참가해 여러 장수들과 함께 왜구를 한 놈도 빠짐없이 섬멸했다. 이 때부터 왜구가 차츰 줄어들고 항복하는 이가 서로 잇달아 나타나서, 바닷가의 백성들이 생업을 회복하게 되었다.

 
조선이 개국한 뒤에 최무선은 늙어서 현역으로 일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태조 이성계는 그의 공을 생각해 직접 검교 참찬(명예 참찬, 정2품)이라는 벼슬을 내렸다.

 
이처럼 조선 초기부터 화약의 중요성은 각별하게 생각되었으며 화약의 제조·보관·사용 및 보안에 관한 왕들의 관심도 아주 컸다. 그 가운데서도 세종 대왕은 특히 화약에 관심이 많았다. 세종 8년(1426) 12월 13일에는 영동의 해안 고을에서는 화약 재료인 염초를 굽지 못하도록 지시했다. 염초를 제작하는 방법이 일본으로 전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또 세종 13년(1431) 10월 15일에는 군기감(각종 병기의 제작·보관을 담당하는 부서)의 화약 창고를 다른 건물이 없는 너른 땅으로 옮기도록 했다. 민가와 화약 창고가 같이 있으면 화재가 일어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었다.


군대의 화약 사용을 얼마나 중요시했는가는 세종 28년(1446) 1월 26일의 「세종 실록」에 상징적으로 나타나 있다. 곧 이 날 의정부를 통해 병조에 내린 지시에 따르면, 군기감에서 근무해 화약 다루는 기술을 익힌 사람은 그만둔 뒤에도 소재를 파악해 위급할 때에 동원할 수 있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또 그 사람이 살고 있는 지역의 관리에게 불시에 점검하도록 하고 먼 지방으로 왕래하는 것을 삼가하도록 지시했다. 요즘으로 치면 일종의 동원 예비군, 그 가운데서도 특수 병과 출신의 동원 예비군 같은 제도였다.


국방 예산이 전체 예산의 3분의 1이 넘는데도, 첨단 무기의 국산화가 지지 부진한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그리하여 우리 나라는 세계 무기 시장에서 첨단 무기의 주요 수입국으로 각광받고 있다. 하지만 각 나라의 이해가 걸린 최첨단 무기는 돈 주고도 사 올 수 없는 형편이다. 중국 사람에게서 화약 제조법을 배웠으나 더 우수한 화약을 만들어 낸 최무선과, 그것을 소중히 여기고 관리·발전시킨 세종 대왕. 오늘날의 그들은 어디에 있는가?


<노회찬과 함께 읽는 조선왕조실록, 도서출판 일빛,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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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18 22:46 2009/10/18 2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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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 중심의 유교 국가인 조선에서 남자들은 부인을 마음대로 갈아치울 수 있었는가? 세종 21년(1439) 11월 10일의 「세종 실록」은 부당하게 부인을 버린 사람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전에 감목관이었던 이중정이 정실 아내를 소박해 버리어 농장에 두고 노비 첩을 사랑해 대접하기를 정실 아내와 같이 해 집안에서 행해야 할 도덕을 그르쳤습니다. 그런데 이중정은 뭇사람의 증거가 명백하건만 버티고 승복하지 않는 데다가 간사하고 모질어 염치를 모르오니, 법에 따라 곤장 90대에 해당하옵니다.

 
위와 같은 사헌부의 보고에 왕은 그대로 따랐다.

 
남편이 아내를 내쫓기 위해선 칠거지악(七去之惡)의 죄에 해당해야 했다. 시부모 봉양을 제대로 못하거나, 아들을 낳지 못하거나, 바람을 피우거나, 질투가 심하거나, 나쁜 병이 있거나, 말이 많거나, 도둑질하는 경우를 일컬어 칠거지악이라 불렀다. 칠거지악에 해당되지 않을 때 함부로 여자를 내칠 수 없었기 때문에 칠거지악은 여성을 보호하는 측면도 있었다. 그러나 그보다는 ‘합법적’으로 부인을 내쫓는 수단으로 이용되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 일곱 가지 죄라는 것이 귀에 걸면 귀걸이요, 코에 걸면 코걸이였던 것이다.

 
이에 따라 칠거지악의 남용에 따른 폐해를 막기 위해 나온 것이 삼불거(三不去)였다. 곧 삼불거란 부인이 쫓겨나면 돌아갈 곳이 없거나, 부모의 3년 상을 같이 치렀거나, 가난할 때 시집 와서 부유하게 되었거나 할 때에는 부인을 내쫓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삼불거도 칠거지악 가운데 시부모에게 불효하거나, 나쁜 병에 걸렸거나, 바람을 피운 경우의 3개 조항을 어겼을 때는 적용되지 않았다.

 
칠거지악도 조선 말기에 와서는 변화를 겪는데 질투가 심하거나 아들이 없는 경우가 제외되어 오거지악으로 일컬어졌다. 그리고 삼불거도 자식이 있을 땐 부인을 내쫓을 수 없게 해 사불거로 확대되기도 했다.

 
칠거지악은 이제 사라진 옛말이 되었다. 시집올 때 호화 혼수를 해오지 못했다고 부인을 구타하고 내쫓는 ‘야만인’도 있지만 그 수가 많지는 않다. 그러나 칠거지악이 없어졌다고 남성 우위의 가부장적 가족 제도와 문화가 없어진 것은 아니다. 비민주적인 남성 위주의 가부장 문화는 가정에서, 직장에서, 그리고 사회에서 여전히 튼튼한 뿌리를 자랑하고 있다.

<노회찬과 함께 읽는 조선왕조실록, 도서출판 일빛,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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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18 22:21 2009/10/18 2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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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90이 되면

2009/10/18 22:19

 

나이 든 사람을 공경하는 일은 유교의 덕목이기도 했지만, 특히 우리 나라에서 예로부터 전해 내려 온 좋은 관습이기도 했다. 조선 초기에도 나이 든 사람을 모시는 아들이나 손자에게는 부역을 면제해 공양에 전념토록 했다. 그러나 세종은 이러한 제도만으로는 미흡하다고 여기면서 파격적인 노인 공경책을 내렸다.
세종의 새로운 지시가 1435년 6월 21일의 「세종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나이 90살 이상으로서, 벼슬을 한 바 없는 이에게는 8품의 벼슬을 내리고 원직이 9품 이상인 사람에게는 각각 1급을 올려 준다. 1백 살 이상은, 원직이 8품인 사람에게는 6품을 주고 원직이 7품인 사람에게는 각각 1급씩을 올려 주되 모두 3품을 한계로 해 그친다. 부인의 봉작은 여기에 준한다. 천민은 90살 이상의 남녀는 각각 쌀 2섬을 내려 주고, 1백 살 이상인 남녀는 모두 천인을 면해 주어 늙은이를 늙은이로 여기는 어짊을 베푸노라.

왕의 평균 수명이 46살이던 조선 시대에 나이 90이 된다는 것은 그 자체로써 축복받을 일이었다. 그러나 놀고 먹는 양반이 아닐 경우 노동력을 상실한 90살 노인이 좋은 대접을 받기란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만큼 이들에게 베푸는 나라의 시혜도 소중한 것이 아닐 수 없었다.
나이 90살 이상이 된 사람에게 벼슬을 내리는 것은 중국에서 이미 시행된 제도로서 조선의 독창적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비록 약간의 차이는 있을 망정 부인과 천인에게도 혜택이 돌아간 사실은 주목할 대목이다. 90살이 넘으면서 남녀와 반상의 차별도 줄어든 것이 아닌가. 오래 살고 봐야 한다는 말이 빈말은 아니었다.

<노회찬과 함께 읽는 조선왕조실록, 도서출판 일빛,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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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18 22:19 2009/10/18 2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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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릉도 영토 분쟁

2009/10/18 16:18
오늘날 한일 양국 사이에 독도가 누구 땅이냐는 논란이 계속되고 있는 것처럼 조선 시대에는 울릉도가 누구 땅이냐는 논란이 있었다. 17세기 말에 있었던 울릉도 영토 분쟁은 조선의 판정승으로 끝났다. 그러나 울릉도의 역사를 살펴볼 때 처음부터 이 논쟁은 일본의 억지가 아니었으면 논쟁거리도 될 수 없는 일이었다.

「세종 실록」 지리지에 따르면 이 섬은 신라 때에는 우산국 또는 울릉도라 일컬어졌다. 오래 전부터 사람이 살았는데, 사람들이 지형이 험하여 따르지 않으므로, 지증왕 12년에 이사부가 이 섬을 복속시켰다. 고려 의종 13년에 심찰사 김유립이 돌아와서 보고했다.

섬 가운데 큰 산이 있는데, 산꼭대기에서 동쪽의 바다까지 1만여 걸음이고, 서쪽으로 1만 3천여 걸음이며, 남쪽으로 1만 5천여 걸음이고, 북쪽으로 8천여 걸음이다. 마을의 터가 7곳이 있고, 이따금 돌부처·쇠북·돌탑이 있으며, 멧미나리·호본·석남초 따위가 많이 난다.

 태종 7년(1407) 3월 16일에는 일본 국왕과 사이가 멀어진 대마도 수호 종정무가,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치면서 울릉도에 옮겨 살기를 청했다. 자신을 따르는 여러 마을이 울릉도로 이주할 수 있게 허락해 달라는 것이다. 일본과 외교 마찰을 우려한 태종은 이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또 태종 12년(1412) 4월 15일에는 울릉도 사람 12명이 동해안 고성 어라진에 정박해 울릉도 사정을 들려주었다.

우리들은 무릉도(울릉도)에서 나서 자랐는데, 그 섬에는 모두 11가구에 60여 명의 남녀가 살고 있습니다. 이 섬은 동에서 서까지, 남에서 북까지가 모두 이틀 거리이고, 둘레가 8일 거리입니다. 소와 말과 논이 없으나, 오직 콩 한 말만 심으면 20∼30섬이 나고, 보리 1섬을 심으면 50여 섬이 납니다. 대나무가 마치 큰 서까래 같고, 과일 나무도 있습니다.

그러나 조선의 조정에서는 울릉도를 사람들이 평화롭게 살고 있는 조그만 섬으로 여기지 않았다. 이 섬은 나라의 행정력이 미치지 않는 먼바다 가운데에 있기 때문에 군역을 피하려는 사람들이 도망해 들어가기도 했다. 실제 고려 시대에는 방지용이란 사람이 15가구를 거느리고 이 섬에 들어가 살면서 왜구인 것처럼 속이고 해적질을 한 적도 있었다. 그 무렵 조정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던 더 큰 문제는 “만일 이 섬에 거주하는 사람이 많으면 마침내 반드시 왜적이 들어와 도둑질하고, 이를 발판으로 강원도를 침범할” 가능성이었다.

그리하여 태종 3년(1403)부터 울릉도의 주민을 육지로 나오도록 명령했고, 태종 16년(1416) 9월 2일에는 김인우를 울릉도 안무사로 파견했다. 그러나 조정의 여론이 모두 이러한 방침에 동조한 것은 아니었다. 1417년 2월 18일의 「태종 실록」에 따르면 신하들 다수의 의견은 “울릉도의 주민을 내쫓지 말고 곡식과 농기구를 주어 생업을 안정시키자. 그리고 관리를 파견해 그들을 위로하고 달래 세금을 부담하게 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오직 공조 판서 황희만 반대했다. 그들이 이제까지 각종 부역을 피해 편히 살아온 사람들이기 때문에 세금을 거두면 반드시 싫어할 것이니 내쫓아야 한다는 것이다. 왕도 황희의 의견에 동의했다.

결국 세종 7년(1425) 10월 20일 안무사 김인우가 울릉도를 수색해 주민 20명을 잡아 왔다. 이 때 김인우는 두 척의 배로 울릉도에 갔는데 그 가운데 한 척이 전복되어 해군 46명이 물에 빠져 죽은 사건도 일어났다. 보고받은 세종 대왕의 반응이 재미있다. 「세종 실록」을 보자.

“김인우가 20여 명을 잡아왔으나 40여 명을 잃었으니 유익한 것이 무엇이냐. 이 섬에는 별다른 특산물도 없으니, 도망해 들어간 이유는 단순히 부역을 면하려 한 것이로구나.”

예조 참판 김자지가 아뢰었다.

“지금 잡아 온 도망갔던 백성에게 법대로 죄를 묻기 바랍니다.”

그러자 임금이 말했다.

“이 사람들은 몰래 다른 나라를 따른 것이 아니요, 또 금지령 이전에 어긴 것이니 새로 죄를 묻는 것은 안된다.”

그리고 임금은 곧 병조에 명을 내려 이들을 충청도의 깊고 먼 산중 고을로 보내 다시 도망하지 못하게 하고, 3년 동안 거주하게 했다. 그 뒤로는 울릉도에 허가 없이 들어간 이는 모두 교수형에 처하도록 했다. 그러나 세종 20년(1438)에도 울릉도에서 남녀 66명을 ‘포획’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토지가 비옥하고 살기 좋은 이 섬을 찾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던 모양이다.

울릉도가 다시 문제의 섬으로 등장한 것은 1693년으로 안용복이라는 용감 무쌍하고 기지가 번득이는 한 ‘민간인’ 때문이었다.

1693년 봄에 울산의 어부 40여 명이 울릉도에 배를 댔는데, 마침 들이닥친 일본 사람들이 안용복·박어둔 2명을 잡아 가 버렸다. 그러나 일본 본토로 끌려간 안용복은 오히려 울릉도가 조선 땅임을 설득해, 이를 확인하는 일본의 공문과 조선에 보내는 공물을 받아 냈다. 그런데 안용복은 돌아오는 길에 대마도에서 이 공문과 공물을 강제로 빼앗기고 오히려 포로로 잡혀 조선에 보내졌다. 그리하여 같은 해 겨울에 대마도에서는 사신 다치바나 신주에게 안용복을 거느려 보내게 하고는, 조선 사람들이 울릉도에서 고기 잡는 것을 금지하기를 요청했다. 대마도 도주의 편지는 이렇게 적고 있다.

귀 나라(조선)의 바닷가에 고기 잡는 백성들이 해마다 본국(일본)의 죽도(竹島 : 그 무렵 일본인들이 울릉도를 일컫던 말)에 배를 타고 왔기 때문에 우리가 다시 와서는 안 된다는 것을 굳이 알렸습니다. 그런데도 올 봄에 어민 40여 명이 죽도에 들어와서 어수선하게 고기를 잡으므로, 우리 관리가 그 가운데 2명을 잡아 두고서 한동안 증거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이제 이들 어민을 고향에 돌려 보내도록 했으니, 지금부터는 저 섬에 절대로 배를 대지 못하도록 조치해, 두 나라의 친분에 틈이 생기지 않도록 하십시오.

조선의 조정에서는 대마도 도주의 서신에 답장을 보냈다.

우리 나라에서는 어민을 단속해 먼바다에 나가지 못하도록 했으며, 또한 우리 나라의 울릉도에도 아득히 멀리 있다는 이유로 마음대로 오가지 못하게 했습니다. 하물며 그 밖의 섬이야 어떻겠습니까? 지금 이 어선이 감히 일본 국경 안의 죽도에 들어갔으나, 번거롭게 이 사람들을 보내 주고 멀리서 편지로 알려 주니, 이웃 나라와 교제하는 두터운 정을 실로 기쁘게 느끼는 바입니다. 바다 백성이 고기를 잡아서 생계로 삼으니 물에 떠내려가는 근심이야 있겠지마는, 국경을 넘어 깊숙이 들어가서 어수선하게 고기를 잡는 것은 법으로도 마땅히 엄하게 징계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범인들을 법률에 따라 죄를 벌하게 하고, 앞으로는 법을 엄하게 제정해 연안 지방에 이를 집행하도록 할 것이오.

묘한 답장이었다. 울릉도는 우리 땅이라는 것을 밝히면서도 동시에 “당신들이 말하는 죽도는 어디 있는지 몰라도 당신네 땅인 모양인데 그 곳으로 조선 사람들이 가지 못하도록 하겠다”는 뜻이었다.

사신 다치바나 신주는 당장 반응을 보였다. 조선의 회답 편지 가운데 ‘우리 나라의 울릉도’라는 말이 왜 들어 가냐는 것이다. 이 말을 빼고 그냥 죽도 문제만 다루라는 요구를 해 왔다. 조정에서 버티자 다치바나 신주는 마침내 대마도로 돌아갔고, 울릉도에 배를 정박했던 사람은 처벌을 받았다. 숙종 20년(1694) 2월 23일자 「숙종 실록」은 조정의 이 같은 일 처리 방식에 대한 사관의 통렬한 비판을 싣고 있다.

왜인들이 말하는 죽도란 곳은 곧 우리 나라의 울릉도다. 울릉이란 이름은 신라·고려의 역사책과 중국 사람의 문집에 나타나 있으니 그 유래가 가장 오래되었다. 섬 가운데 대나무가 많이 나기 때문에 죽도란 이름 또한 있지마는, 실제로 한 섬에 두 개의 이름이 있는 셈이다. 왜인들은 울릉이란 이름은 숨기고 다만 죽도에서 고기 잡는다는 이유를 구실 삼아, 금지하겠다는 우리 나라의 회답을 받은 뒤에 곧바로 위의 편지를 가지고서 울릉도를 점거하려는 의도인 것이다. 아! 나라의 강토는 남에게 줄 수 없으니 명백히 가리고 엄격히 물리쳐서 교활한 왜인이 다시는 마음을 먹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도 빈틈 없고 신중한 것이 지나쳐 단지 견제하려고만 했다. 이것이 이웃 나라에 더욱 약점으로 보였으니, 애석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아니나 다를까. 사관이 염려한 대로 같은 해 8월 14일 대마도 도주의 2차 편지가 도착했다. 전에 보낸 조정의 답변서는 아예 반송되어 왔다. 2차 편지는 이렇게 적고 있다.

 우리 편지에는 일찍이 울릉도를 언급하지 않았는데, 답변서에는 갑자기 ‘울릉’ 두 글자를 거론했습니다. 이는 알기 어려운 바이니 오직 삭제하기 바랍니다.

 그 말에 따라 앞의 답장을 고치자는 의견도 있었다. 그러나 반대가 더 많았다.

 이미 국가의 공식 서한으로 사신에게 부쳤는데, 어찌 감히 다시 와서 고치라고 요청할 수 있습니까? 이를 꾸짖으면서 “죽도는 곧 우리 울릉도다. 우리 나라 사람이 가는 것이 어찌 국경을 넘어간 것인가?”라고 한다면, 왜인들이 할 말이 없을 것입니다.

 결국 1차 답변서를 다음과 같이 고쳐서 강경한 태도를 밝히도록 했다.

우리 나라 강원도의 울진현에 속한 울릉도란 섬이 있는데, 동해 가운데 있고 파도가 험하고 사나워 뱃길이 편하지 못합니다. 이 때문에 몇 해 전에 백성을 옮겨 땅을 비워 놓고, 수시로 관리를 보내 왔다 갔다 하며 순찰하도록 했습니다. 이 섬은 우리 나라의 『동국 여지 승람』이란 책에도 실려 있어, 역대에 전해 오는 곳이 분명합니다. 이번에 우리 나라 해변의 어민들이 이 섬에 갔는데, 뜻밖에도 귀 나라의 사람들이 멋대로 침범해 와 서로 맞부딪치게 되자, 도리어 우리 나라 사람들을 끌고서 에도까지 잡아갔습니다. 다행히 귀 나라의 대군이 분명하게 사정을 살펴보고서 넉넉하게 노자를 주어 보냈으니, 이는 이웃 나라와 교분이 보통이 아님을 알 수 있는 일입니다. 높은 의리에 탄복했으니 그 감격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 백성이 고기잡이하던 땅은 본디 울릉도로서, 대나무가 생산되기 때문에 더러 죽도라고도 했습니다. 이는 곧 하나의 섬을 두 가지 이름으로 부른 것입니다. 하나의 섬을 두 가지 이름으로 부른 상황은 단지 우리 나라 책에만 기록된 것이 아니라 일본 사람들 또한 모두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온 서신 가운데 죽도를 귀 나라의 지방이라 해 우리 나라의 어선이 가는 것을 금지하려고 했고, 귀 나라 사람들이 우리 나라 국경을 침범해 와 우리 나라 백성을 붙잡아 간 잘못은 논하지 않았으니, 어찌 문제 있는 조치가 아니겠습니까? 깊이 바라건대, 귀 나라의 국경 해안 사람들을 거듭 단속해 울릉도에 오가며 다시 분쟁을 일으키는 일이 없도록 한다면, 서로 좋게 지내는 의리에 이보다 다행함이 없겠습니다.

일본 사신 다치바나 신주는 답변서를 보더니 ‘침범해 오다’와 ‘붙잡아 갔다’ 같은 어구를 고치기를 청했으나, 조정은 들어주지 않았다. 다치바나 신주는 또 일본의 2차 서신에 대한 답장도 따로 요구했다. 그는 집요했다. “하나의 섬이 두 가지 이름으로 되어 있는 실상은 다만 우리 나라 책에 기록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일본 사람들 또한 모두 안다”면 처음의 답변서에는 왜 죽도를 일본 땅이라고 했느냐는 것이다.

조선의 조정이 트집 잡힐 실수를 했지만 다치바나 신주의 논리에도 무리가 많았다. 그런데도 그는 ‘사명감’이 어떤 것인지를 처절하게 보여 주었다. 자신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그는 2년 동안 왜관에 머무르며 반드시 요구를 달성하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자신이 사신의 임무를 다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조정에서 전례에 따라 공급하는 물품을 전혀 받지 않았다. 그리하여 해진 옷을 입고 밥을 구걸해 먹으며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고초를 겪었지만, 끝내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그는 바다를 건너 귀국할 때, 조정에서 대마도로 보낸 쌀 1,860섬과 조정의 답변서를 동래부로 돌려 보내고 떠났다.

다치바나 신주가 대마도로 돌아간 이듬해인 숙종 22년(1696) 9월 25일 안용복은 다시 체포되어 비변사의 신문을 받았다. 금지 구역인 울릉도에 또 들어갔다는 죄명이었다. 사실 안용복은 1694년 대마도에서 조선으로 돌아온 뒤로 그 동안 조정과 대마도 사이에 울릉도에 대한 논란이 벌어진 사실을 알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았다. 그는 평범한 어부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1696년 해산물이 많은 울릉도로 다시 들어갔을 때 그는 또 왜인들과 부닥뜨리게 되었다. 「숙종 실록」에 나오는 그의 말을 들어 보자.

울릉도에 들어가니 왜선이 많이 와 정박해 있어서 뱃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했습니다. 제가 앞장서서 “울릉도는 원래 우리 땅인데, 왜인이 어찌 감히 국경을 넘어 침범했는가? 너희들을 모두 잡아서 묶어야겠다”고 말하고 뱃머리로 나아가 큰소리로 꾸짖었습니다. 그랬더니 왜인이 “우리들은 원래 송도에 사는데 우연히 고기잡이하러 나왔다. 이제 그 곳으로 돌아갈 것이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송도는 자산도로서, 그것도 우리 나라 땅인데 너희들이 감히 거기에 사는가?” 했습니다.

이튿날 새벽에 배를 몰아 자산도에 갔더니, 왜인들이 막 가마솥을 걸어 놓고 고기 기름을 끓이고 있었습니다. 제가 가마솥을 몽둥이로 쳐서 깨뜨리고 큰 소리로 꾸짖었습니다. 그러자 왜인들이 짐을 거두어 배에 싣고서 돛을 올리고 돌아가길래 제가 곧 배를 타고 뒤쫓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광풍을 만나 표류해 옥기도(독도에서 남동쪽으로 150킬로미터 떨어진 섬)에 이르렀습니다. 도주(島主)가 제게 들어온 까닭을 묻길래 이렇게 말했습니다.

“몇 해 전에 내가 이 곳에 들어와서 울릉도·자산도를 조선의 영토로 정하고, 관백의 확인서까지 받았다. 그런데 이 나라에는 도대체 법도가 없어서 이제 또 우리 국경을 침범했다. 이것이 무슨 도리인가?”

그는 마땅히 백기주에 사람을 보내 알리겠다고 했으나, 오랫동안 소식이 없었습니다. 제가 분을 참지 못해 배를 타고 곧장 백기주로 가서 “나는 울릉도·자산도 두 섬의 세금 감독관인데, 앞으로 사람을 시켜 일본 본토에 통고하려고 한다”고 꾸며댔습니다. 그랬더니 그 섬에서 사람과 말을 보내 맞이하므로, 저는 푸른 색 무관 제복을 입고 검은 갓을 쓰고 가죽신을 신고 가마를 타고 다른 사람들도 모두 말을 타고서 그 고을로 갔습니다. 저는 도주와 대청 마루 위에 마주 앉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계단에 앉았습니다. 도주가 “어찌해 들어왔는가?” 묻길래 제가 이렇게 답했습니다.

“전날 두 섬의 일로 확인서를 받아 낸 것이 명백한데, 대마도의 도주가 이 공문을 빼앗고는 중간에서 위조하는 따위로 법을 어겨 함부로 침범했다. 그러므로 내가 앞으로 관백에게 상소해 죄상을 두루 말하려 한다.”

그러자 도주의 아비가 간곡히 부탁했습니다.

“이 상소를 올리면 내 아들이 반드시 무거운 죄를 얻어 죽게 되니 바치지 말기 바랍니다.”

그래서 제가 관백에게 올리지는 않았으나, 전날 국경을 침범한 왜인 15명을 적발해 처벌했습니다.

조선의 조정은 이번에는 안용복의 처벌 문제로 논란에 휩싸였다. 울릉도에 들어간 일이며, 공직을 사칭한 것이 죄목으로 지적되었다. “안용복의 일은 아주 놀랍지만 국가에서 못 하는 일을 그가 잘 해냈기 때문에, 공로와 죄과가 서로 덮을 만하니 쉽게 벌 줄 수는 없다”는 주장도 있었다.

안용복의 행동을 처벌하지 않으면 조정에서 부추겼다는 오해를 받을 수 있다는 지적도 있었다. 이제까지 일본 본토와는 대마도를 통해 교류해 왔는데, 안용복이 개척한 루트로 본토와 직거래가 가능해졌으니 그 공도 인정해야 한다는 점도 지적했다. 무엇보다도 “대마도의 왜인이 울릉도를 죽도라 거짓 칭하고, 일본 국왕의 명령이라고 거짓으로 핑계 대어 우리 나라 사람들이 울릉도에 오가는 것을 금지하게 하려고 중간에서 속여 농간을 부렸다. 이제 그 과정이 안용복 때문에 죄다 드러났으니, 이것 또한 유쾌한 일이다”는 여론이 높았다.

조정에서 논란을 계속하던 가운데 1697년 2월 대마도 도주는 일본 관백의 명령으로 왜인들의 울릉도 왕래를 금지한다고 통보해 왔다. 이제 조정도 “왜인의 기를 꺾어 굴복시킨 것은 안용복의 공”임을 인정했다. 동시에 조정은 자신의 권위와 체면도 세우려 했다. 그리하여 숙종 24년(1697) 3월 27일 왕은 안용복에게 사형을 면제하고 유배 보내도록 명령했다.

말 그대로 울릉도는 ‘버려진 땅’이었다. 국가의 통치력이 채 미치지 못하는 땅이 있으면, 경우에 따라 그 곳은 다른 지역의 ‘통치’에 나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판단에 따라 일부러 ‘비워 둔 땅’이 되기도 했다.

오늘날의 독도 문제와 마찬가지로 울릉도는 일본과의 영토 분쟁이 벌어지면서 중요하게 생각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군부대를 주둔시키자는 제안이나 감독관을 파견해야 한다는 주장은 현실의 어려움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대신 2년에 한 번씩 국가에서 순찰하도록 했으나, 그나마도 순번제로 임무를 맡았던 동해안의 각 행정 기관에서 어려움을 호소하여 유야 무야 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인삼 농사가 잘 된다는 소문으로 울릉도는 다시 각광받았다.

울릉도를 ‘사람 사는 땅’으로 만든 것은 국가의 법률이나 정부의 시책이 아니었다. 끈질긴 삶의 본능이었다. 그리고 안용복과 같은 상식을 가진 인간들의 용기였다.

한편 울릉도를 죽도라고 부르면서 자기네 땅이라고 우겼던 일본인들은 요즘에는 독도를 죽도라고 부르면서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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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18 16:18 2009/10/18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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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회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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