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에도 레즈비언이 있었을까? 그들은 어떤 처벌을 받았는가? 세종 대왕은 이 물음에

대한 최고위 증언자다. 세종 18년(1436) 10월 26일의 「세종 실록」은 전한다.

 내가 늘 듣건대 시녀와 종비 들이 사사로이 서로 좋아해 동침하고 자리를 같이 한다고 하므로, 이를 아주 미워해 궁중에 금지령을 엄하게 내렸다. 어기는 사람이 있으면 이를 살피는 여자 내관이 아뢰어 곤장 70대를 집행하게 했고, 그래도 그만두지 못하면 곤장 1백 대를 더 집행하기도 했다. 그런 뒤에야 그 풍습이 조금 그치게 되었다.

 
그런데 세종의 맏아들인 문종의 첫 번째 부인 김씨가 폐출된 뒤, 세자빈이 된 봉씨가 동성 연애 행각을 벌이다 발각된 것이다. 말하는 것조차 수치스럽다면서 세종은 입을 연다.


요사이 듣건대, 봉씨가 궁궐의 여종 소쌍이란 사람을 사랑해 늘 그 곁을 떠나지 못하게 하니, 궁인들이 가끔 서로 수군거리기를, “빈께서 소쌍과 늘 잠자리와 거처를 같이 한다”고 했다. 어느 날 소쌍이 궁궐 안에서 청소를 하고 있는데 세자가 갑자기 묻기를, “네가 정말 빈과 같이 자느냐”고 하니 소쌍이 깜짝 놀라서 대답하기를, “그러하옵니다” 했다.


소쌍이 또 권승휘(세자의 세 번째 부인)의 개인 노비인 단지와 서로 좋아해 이따금 함께 자기도 했는데, 봉씨가 자신의 개인 노비인 석가이를 시켜 늘 그 뒤를 따라다니게 해 단지와 함께 놀지 못하게 했다. 전에는 봉씨가 새벽에 일어나면 늘 시중 드는 여종들로 하여금 이불과 베개를 거두게 했는데, 자기가 소쌍과 함께 동침하고 자리를 같이 한 뒤로는, 다시는 시중 드는 여종을 시키지 않고 자기가 이불과 베개를 거두었으며, 또 몰래 그 여종에게 그 이불을 세탁하게 했다.

 이러한 일들이 궁중에서 자못 떠들썩한 까닭으로, 내가 중전과 함께 소쌍을 불러서 그 진상을 물으니 소쌍이 말하기를, “지난해 동짓날에 빈께서 저를 불러 내전으로 들어오게 하셨는데, 다른 여종들은 모두 지게문 밖에 있었습니다. 저에게 같이 자기를 요구하므로 저는 이를 사양했으나, 빈께서 윽박지르므로 마지못해 옷을 반쯤 벗고 병풍 속에 들어갔습니다. 그랬더니 빈께서 저의 나머지 옷을 다 빼앗고 강제로 들어와 눕게 해, 남자와 교합하는 형상과 같이 서로 희롱했습니다” 했다.


이에 내가 세자빈을 직접 불러 이 사실을 물으니 빈이 대답하기를, “소쌍이 단지와 함께 늘 사랑하고 좋아해, 밤에만 같이 잘 뿐 아니라 낮에도 목을 맞대고 혓바닥을 빨았습니다. 이것은 곧 저희들이 하는 짓이오며 저는 처음부터 동침한 일이 없습니다” 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증거가 아주 명백하니 어찌 끝까지 숨길 수 있겠는가. 또 저들이 목을 맞대고 혓바닥을 빨았던 일을 어찌 빈이 알 수 있겠는가. 늘 그 일을 보고 부러워하면 반드시 그 형세를 본받아 이를 따라하게 되는 것은 더욱 의심할 여지가 없다.


세종 대왕의 고백에 따르면 두 번째 며느리 봉씨는 여러 면에서 사고 뭉치였다. 임신했다고 거짓말을 해 궁중을 한 번 뒤집어 놓는가 하면 세종이 『열녀전』을 배우도록 하자 “내가 어찌 이것을 배운 뒤에 생활하겠는가” 하며 며칠만에 책을 뜰에 던져 버렸다. 또 시녀들의 변소에 가서 벽 틈으로 일보는 사람을 엿보는가 하면, 궁궐 여종에게 자신이 지은 남자를 사모하는 노래를 부르게 했다. 또 술을 즐겨 늘 방 안에 술을 준비해 두고는 큰 그릇으로 연거푸 마셔 몹시 취하기를 좋아했다. 그리하여 어떤 때는 시중 드는 여종에게 업혀 뜰 가운데로 다니게 하고, 또 어떤 때는 술이 모자라면 사사로이 친정 집에서 가져와서 마시기도 했다.

 
세자빈 자리에서 쫓겨난 봉씨는 친정 아버지에 의해 죽임을 당했고 친정 아버지 역시 자결했다.

 
동성애자들의 오늘도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 사회에서 이들에 대한 사회적 반감과 차별은 서양보다 더욱 심하다. 피부색과 국적이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받아선 안 되듯이, 성적 지향(동성애 또는 이성애)이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하지 말라는 이들의 외침은 아직은 절규에 가깝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함께 평화롭게 살기 원한다는 취지에서 만든 무지개 빛깔의 동성애자 깃발은 그래서 더욱 애처롭게 보인다.

<노회찬과 함께 읽는 조선왕조실록, 도서출판 일빛,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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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18 23:25 2009/10/18 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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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 이방원은 12명의 부인에게서 모두 12남 17녀의 자식을 얻었다. 다행히 정실인 원경 왕후에게서 4남 4녀의 소생을 얻었기에 일찍이 장남인 양녕 대군을 태자로 책봉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양녕 대군은 사냥과 풍류에 탐닉하는가 하면 기이한 행동을 일삼아 세자 자격을 박탈당하고 만다.

 
양녕의 이러한 행동에 관한 배경에는 몇 가지 설이 전해 오고 있다. 그것은 첫째, 양녕은 아버지인 태종 이방원이 형제를 셋이나 죽이고 왕위에 오르는 것을 보고 애초부터 왕세자가 되고 싶지 않았다는 것이다. 둘째, 태종의 마음이 셋째 아들인 충녕 대군에게 있음을 간파하고 왕세자 자리에서 물러나기 위해 일부러 기이한 행동을 일삼았다는 것이다.

 
여하튼 양녕이 도를 넘는 광기를 보인 것은 사실이다. 자신의 선생을 처음 맞이하던 날 스승 앞에서 개 짖는 시늉을 낸 것은 수많은 기행 가운데 하나의 예일 뿐이다. 양녕이 미친 것처럼 행동한 배경을 정확히 설명할 자료는 없다. 그러나 태종이 처음부터 충녕 대군에게 마음이 있었다는 설명은 사실이 아니다. 「세종 실록」 총서에 따르면 1418년 태종이 양녕 대군을 왕세자 자리에서 폐하면서 양녕의 맏아들에게 왕세자 자리를 계승하려고 했다. 정실에서 태어난 장남이 아니면서 왕위에 오른 다른 왕들처럼, 우여 곡절 끝에 왕위에 오른 태종은 뒷날의 시비를 예방하고 왕실을 강화하기 위해 장남이 아니라면 장손을 후계자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자 여러 신하들이 나서서 반대했다.

 
“이제 어린 손자를 세운다면 어찌 앞날의 무사함을 보장하오리까. 하물며 아버지를 폐하고 아들을 세움이 의리에 어떠하올지. 청컨대 아드님 가운데 어진 이를 골라서 세우시기를 바라옵니다.”

 
그러자 태종이 말했다.

 
“그러면 경들이 마땅히 어진 이를 가리어 아뢰라.”

 
여러 신하들이 함께 아뢰었다.

 
“아들이나 신하를 아는 데 아버지나 임금과 같은 이가 없사오니, 가리는 것이 성심에 달렸사옵니다.”

 
노련하고 현명한 신하들이었다. 특정 왕자를 잘못 지목했다가 닥칠지도 모르는 위험을 피한 것이다. 당신 아들은 당신이 잘 아니까 직접 고르라는 말이었다.

 
태종은 결국 신하들의 말을 좇아 양녕의 장남을 포기하고 셋째 아들 충녕을 왕세자로 책봉했다. 태종이 자신의 뜻을 굽히고 신하들의 말을 따를 만큼, 충녕은 어려서부터 성실하고 영특해 여러 왕자들 가운데서도 돋보이는 존재였다.


<노회찬과 함께 읽는 조선왕조실록, 도서출판 일빛,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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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18 22:50 2009/10/18 2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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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살에 왕위에 오른 세종 대왕은 54살에 하직했으니 32년 동안 왕위에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늘 격무에 시달리던 세종은 40대에 들어서면서 급속히 건강이 나빠졌다. 그래서 세종은 이미 장성한 왕세자에게 결재권을 넘겨 주고 자신은 일상 업무에서 물러나기를 희망했다. 마흔 살이 되던 1436년에 왕세자의 섭정 문제를 꺼냈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양보했던 세종은 결국 1442년에 가서야 뜻을 이룬다. 만류하던 신하들을 설득할 수 있었던 것은 날로 악화되어 가던 자신의 건강 상태 때문이었다.

 
세종 21년(1439) 6월 21일의 「세종 실록」에는 마흔두 살의 세종이 말하는 자신의 병세가 기록되어 있다.

 
내가 젊어서부터 한 쪽 다리가 지나치게 아파서 10여 년만에 조금 나았는데, 또 등의 부종으로 아픈 지 오래다. 아플 때를 당하면 마음대로 돌아눕지도 못해 그 고통을 참을 수가 없다. 지난 계축년 봄에 온천에서 목욕하려 했으나, 대간에서 폐가 백성에게 미친다고 하고, 대신도 안 된다고 말하는 이가 있었다. 내가 두세 사람이 청하길래 온천에서 목욕을 했더니 과연 효험이 있었다. 그 뒤에 이따금 다시 발병할 때가 있으나, 그 아픔은 전보다 덜하다. 또 소갈증(당뇨병)이 있은 지 열서너 해가 되었다. 그러나 역시 이제는 조금 나았다. 지난해 여름에 또 임질을 앓아 오래 정사를 보지 못하다가 가을 겨울에 이르러 조금 나았다. 지난 봄 무술을 배운 뒤에는 왼쪽 눈이 아파 안막을 가리는 데 이르고, 오른쪽 눈도 어두워져서, 한 걸음 사이에서도 사람이 있는 것은 알겠으나 누구인지를 알지 못하겠으니, 지난 봄에 무술을 배운 것을 후회한다. 한 가지 병이 겨우 나으면 한 가지 병이 또 생기매 나의 노쇠함이 심하다.

 
뒷날 문종이 되는 왕세자에게 많은 업무를 이양한 뒤에도 세종의 격무는 계속되었다. 이 시절의 업적 가운데 하나가 바로 1443년 창제하고 1446년 반포한 훈민 정음이다.

<노회찬과 함께 읽는 조선왕조실록, 도서출판 일빛,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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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18 22:48 2009/10/18 2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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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90이 되면

2009/10/18 22:19

 

나이 든 사람을 공경하는 일은 유교의 덕목이기도 했지만, 특히 우리 나라에서 예로부터 전해 내려 온 좋은 관습이기도 했다. 조선 초기에도 나이 든 사람을 모시는 아들이나 손자에게는 부역을 면제해 공양에 전념토록 했다. 그러나 세종은 이러한 제도만으로는 미흡하다고 여기면서 파격적인 노인 공경책을 내렸다.
세종의 새로운 지시가 1435년 6월 21일의 「세종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나이 90살 이상으로서, 벼슬을 한 바 없는 이에게는 8품의 벼슬을 내리고 원직이 9품 이상인 사람에게는 각각 1급을 올려 준다. 1백 살 이상은, 원직이 8품인 사람에게는 6품을 주고 원직이 7품인 사람에게는 각각 1급씩을 올려 주되 모두 3품을 한계로 해 그친다. 부인의 봉작은 여기에 준한다. 천민은 90살 이상의 남녀는 각각 쌀 2섬을 내려 주고, 1백 살 이상인 남녀는 모두 천인을 면해 주어 늙은이를 늙은이로 여기는 어짊을 베푸노라.

왕의 평균 수명이 46살이던 조선 시대에 나이 90이 된다는 것은 그 자체로써 축복받을 일이었다. 그러나 놀고 먹는 양반이 아닐 경우 노동력을 상실한 90살 노인이 좋은 대접을 받기란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만큼 이들에게 베푸는 나라의 시혜도 소중한 것이 아닐 수 없었다.
나이 90살 이상이 된 사람에게 벼슬을 내리는 것은 중국에서 이미 시행된 제도로서 조선의 독창적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비록 약간의 차이는 있을 망정 부인과 천인에게도 혜택이 돌아간 사실은 주목할 대목이다. 90살이 넘으면서 남녀와 반상의 차별도 줄어든 것이 아닌가. 오래 살고 봐야 한다는 말이 빈말은 아니었다.

<노회찬과 함께 읽는 조선왕조실록, 도서출판 일빛,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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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18 22:19 2009/10/18 2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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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근소사라는 여인이 그의 양아들인 변득비와 간통해 임신한 사건이 발생했다. 세종 대왕은 자신의 의견을 말하면서 의정부와 육조의 견해를 물었다. 세종의 의견은 이러했다.

이 일은 천하가 용서할 수 없는 행위다. 그러나 율문에 “간음 현장에서 붙잡지 않고 간음했다고 고소하는 것은 논죄하지 말라. 임신한 것이 분명하면 단지 그 여자 본인만 처벌한다”고 되어 있지 않느냐? 소근소사가 간음한 정상이 비록 뚜렷하나 간음 현장에서 붙잡은 것이 아니니, 다만 그 여자를 처벌할 뿐이고, 간부는 율문에 따라 사건을 수리하지 않아야 마땅하다.

이어지는 세종의 논리 전개는 다음과 같다. 곧 “만약 양반의 본처가 이 같은 일을 범했을 때 차마 간음 현장에서 붙잡은 것이 아니라고 해서 어찌 그냥 내버려 둘 수 있겠는가? 그러나 법률의 규정을 준수하지 않고 일을 처리한다면 그 폐단은 더 크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또 일반인들은 가까운 사이이거나 친족일 경우 안팎 구별이 엄하지 않은데, 만약 원수나 원한이 있는 자가 있어서 아무개가 아무개와 간통했다고 고발하면 그 말에 좇아서 형벌을 주는 것은 율문에 어긋나는 바가 있다는 것이다. 물증 없이 심증만으로 처벌할 수 없다는 말이다.

이럴 때도 옳고 그름을 묻지 않고 처벌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있기 마련이다. 그들은 말한다.

법률이 비록 그러하나 이 일은 삼강 오륜에 관계되는 것이니 벌을 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이 여자는 매 한 대도 치지 않았는데 하나하나 정상을 고백했으니 거짓 자백한 것이 아닙니다. 마땅히 중한 형벌에 처해 야박한 풍속을 징계하게 하소서.

나흘 뒤인 1431년 6월 22일의 「세종 실록」은 의금부에 보고한 이 일의 결말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지금 소근소사와 이웃 사람들과 관령들을 국문했으나 사건의 증거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또 법률에 ‘간음한 장소에서 붙잡지 않은 것과 간음했다는 고발만으로 죄를 논하지 말 것이며, 간부(奸婦)가 임신한 것은 그 여자 본인을 처벌한다’고 했습니다. 더군다나 이번 6월 21일에는 도주범 말고는 모두 다 용서했으니, 청컨대 소근소사를 석방하소서.

심증으로 윽박지르고 자백만으로 기소하는 경우는 요즘도 문제가 되고 있다. 우리는 5백 년 전보다 더 나은 세상에 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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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18 20:56 2009/10/18 2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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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 대전 직후 독도는 한때 극동 지역의 미공군 폭격기들의 사격 연습 표적물이었다. 독도가 갖고 있는 한일 양국 사이의 역사 지리적 의미를 알 까닭이 없던 미국인들에게, 그 섬은 단지 망망 대해에 떠 있는 무인도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 때 해산물을 채취하기 위해 독도로 들어간 해녀들과 바람을 피해 정박하고 있던 어선의 어부를 비롯한 몇십 명이 미 공군기의 폭격에 숨졌다. 지금도 독도 해안에는 당시 미 공군기에서 투하된 불발탄들이 여기저기 깔려 있다.


그로부터 20년 뒤에 독도는 또 한 번 ‘없어질 뻔’ 했다. 한일 국교 정상화를 추진하기 위해 밀사로 파견된 한국의 한 정치인이 독도 문제가 한일 협정 체결의 걸림돌이 되자 “아예 독도를 폭파시켜 없애는 것이 어떠냐”는 ‘기발한’ 제안을 한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독도를 없애진 못했다.


독도를 일본에선 다케시마(竹島)라고 부른다. 그러니까 독도 문제는 일본에선 죽도 문제인 셈이다. 17세기 말 조선과 일본 사이에 울릉도 영토 분쟁이 벌어지던 무렵, 일본은 울릉도를 죽도라 불렀다. 울릉도가 죽도로 일컬어진 것은 대나무가 많았기 때문이다. 지금도 울릉도 북동쪽 해안에서 겨우 10리 정도 떨어진 작은 섬을 울릉도 사람들은 죽도라 부른다. 일본 연안의 섬들을 제외한다면 동해 먼바다의 섬은 울릉도와 독도뿐이다. 그리고 울릉도는 삼국 시대부터 한반도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었다.


조선 초기 무렵에 동해에 울릉도 말고 또 다른 섬이 있으며 이 섬을 본 사람도 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소문의 섬은 요도(寥島 또는 蓼島)라 일컬어졌다. 이 소문은 세종 대왕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세종 11년(1429) 12월 27일 왕은 이안경이란 신하를 강원도로 보내 요도를 방문하도록 했다. 이안경이 섬을 못 찾고 돌아오자 이듬해 1월 26일 함길도(지금의 함경도) 감사에게 이렇게 지시했다.

 
옛날에 요도에 가 본 적이 있는 사람이나, 이 섬의 상황을 전부터 보고 들은 사람을 모두 찾게 했다. 그러자 함흥부 포청사에 사는 김남련이란 사람이 일찍이 이 섬에 갔다가 돌아왔다고 한다. 그 사람에게 역마를 보내게 하라. 만약 그 사람이 늙고 병들었거든, 이 섬의 생김새와 주민들의 생활이 어려운지 넉넉한지, 의복·언어·음식 따위 사정은 어떠한지 자세히 물어서 아뢰어라.

 
다른 곳에서 새로운 정보를 입수했는지 3달 뒤인 4월 4일 왕은 함길도 감사에게 추가 지시를 내린다.

 
경성 무지곶과 홍원 보청사에 사람을 시켜 올라가 바라보게 하면 요도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그 수령관이나 또는 꼼꼼하고 눈이 밝은 수령에게 지금 가는 김남련과 함께 가서 요도의 지형과 뱃길의 험하고 편함을 살펴보고 아뢰어라. 만약 김남련과 함께 요도에 갔다가 돌아온 사람이나 해변에 살면서 바라본 이가 있거든 육지와 먼지 가까운지를 물어서 아뢰어라.

 
그리고 다음날 왕은 상호군(정3품 벼슬) 홍사석을 강원도에 보내 요도를 찾아보게 했다. 요도를 찾으려는 세종의 심정은 아주 조급했던 것 같다. 사흘 뒤인 4월 7일 다시 왕은 신인손을 함길도에 보내 요도를 찾아보게 했다. 그러나 아직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소문마다 위치도 제각각이었다. 7월 26일, 이번에는 강원도 감사에게 찾아보도록 지시했다.

 
무릉도(울릉도)는 본래 사람이 살던 곳이며, 옛날부터 왕래하던 땅이다. 그러나 요즘에 사람을 보내 큰 바다를 건너게 하고서는, 오히려 그 험난함 때문에 밤낮으로 걱정해 왔다. 하물며 이 요도는 비록 어디에 있다고는 일컬어 왔지만 원래 오가는 사람이 없었으니, 내가 이미 노쇠한 나이에 감히 그 섬을 찾아보기를 바라겠는가. 다만 그 섬이 양양 동쪽에 있다고만 일컬어 왔을 뿐이니, 어느 곳에 있다는 사실만은 반드시 알아야 하겠다. 경은 마땅히 이를 다시 탐문해 아뢰어라.

 
세종 23년(1441) 7월 14일 세종은 새 땅을 찾아 나섰던 한 무제와 당 태종의 예를 들어가며 함길도 관찰사와 절제사에게 간절한 지시를 내린다.

 
함길도에 새 땅이 있다는 일은 떠들썩하게 얘기된 지 이미 여러 해 되었고, 직접 말하는 이도 또한 한둘이 아니었으니, 까닭없이 그러했겠는가. 생각하건대 그 섬은 실제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사람을 보내 찾게 한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아직도 찾지 못했다.


지난날 강원도의 무릉도를 찾으려고 할 때 모두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한다”고 했는데, 뒤에 조민이 찾아내 상을 탔다. 조민의 일을 듣고서, 요도 또한 자기가 찾겠다고 희망하는 이가 이따금 있었다. 무릇 토지나 서적을 찾아 내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다. 따라서 반드시 성심을 다해 찾은 뒤에야 얻게 되는 것이 천하 고금의 일반적인 일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얻고 얻지 못하고는 구하는 데에 정성이 어떠한가에 달려 있다. 지금 새 땅의 일 또한 이와 같은 것이다. 만약 그 섬이 없다면 어찌 이같이 오래도록 전해질 것이며, 말하는 이가 어찌 이같이 많겠는가. 하물며 이 새 땅은 우리 나라 땅 안에 있는 것이니 더욱 알아야 할 것이다. 성심을 다해 찾으면 반드시 이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경은 함길도 안의 노인들과 이 일을 아는 각 사람들에게 상금을 걸어 묻기도 하고, 또는 설명해 묻기도 하는 따위로 여러 가지를 계획해 널리 탐문하고 찾아서 아뢰어라.


세종 27년(1445)에는 삼척 앞바다에서 그 섬을 보았다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신하들도 여러 방향으로 나서서 목격자를 찾았다. 8월 17일 왕은 다시 강원도 감사에게 지시하며 대가를 직접 약속하기까지 했다.


"내가 이 섬을 찾는 까닭은 토지를 넓히자는 것이 아니고 또 그 백성을 얻어서 부리자는 것도 아니다. 의지할 데 없는 사람들이 바다 가운데에 모여 살아 창고와 식량의 준비가 없을 테니, 한번 흉년을 만나면 반드시 굶어 죽게 될 것이다. 그것을 누가 구제하겠는가. 강원도의 백성들이 바다 가운데에 깊이 들어가 고기 낚는 것으로 생업을 삼으니, 그 가운데 어찌 그 섬을 직접 본 사람이 없겠는가. 또 어느 곳에 있는지 자세히 아는 이가 어찌 없겠는가. 다만 개인적으로 갔다 온 죄를 두려워해 서로 숨기고 비밀로 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리석은 백성의 일에 국가에서 반드시 죄를 묻지는 않겠다. 만일 알리는 사람이 있어 이를 알게 되었다면 양민은 등급을 뛰어서 벼슬로 상을 줄 것이고, 관가의 천인은 일생 동안 사역을 면제하고 무명 50필로 상을 줄 것이며, 개인 집의 천인은 무명 1백 필로 상을 줄 것이다. 또한 향리·역리 들은 사역을 면제할 것이며, 섬에 들어가 사는 사람은 향리로 돌려 보낼 것이다. 마침내 큰 공이 있으면 양민은 3등급을 뛰어서 벼슬을 줄 것이고, 천인은 영원히 풀어 주어 양민이 될 것이다. 또한 향리·역리 들은 대대로 사역을 면제하고 등급을 뛰어서 벼슬을 줄 것이고, 섬에 들어가 사는 자는 향리로 임명할 것이다. 그러니 이 뜻에 따라 경은 두루 알려라."

 
세종은 결국 요도를 찾지 못했다. 성종 4년(1473) 1월 9일의 「성종 실록」에는 “무릉도(울릉도)의 북쪽에는 요도가 있는데 한 사람도 다녀온 사람이 없다”는 소문을 들은 왕이 이 섬을 찾아보도록 지시하는 기록만이 나온다.


그 뒤 요도를 찾으려는 왕은 없었다. 다만 소문만이 무성할 뿐이었다. 제주도의 남쪽 먼바다에 있다는 이어도처럼 요도는 실재하지 않는 전설의 섬인가? 동해안에서 갈 수 있는 섬은 울릉도와 독도뿐인데, 울릉도가 널리 알려진 반면 독도에 관한 별도의 언급은 찾아보기 힘들다. 이 같은 사실이 바로 요도가 독도라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은 아닐까? 동해 연안에서 고기잡이하다가 표류해 울릉도나 심지어는 일본까지 떠내려가는 경우도 이따금 있었다. 그러므로 소문처럼 요도를 본 사람이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울릉도보다 더 멀고, 섬이 작으며, 배를 대기 힘들고, 물도 나오지 않아 오래 머물 수 없는 탓으로 울릉도만큼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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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18 20:24 2009/10/18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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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 11년(1411) 한 마리의 코끼리가 서울에 등장했다. 일본 국왕 미나모토노요시 타모쓰가 사신을 통해 보낸 것이다. 처음에 이 코끼리는 왕의 수레와 말을 관리하는 사복시(司僕寺)에서 맡아 길렀다.


그런데 1년쯤 지난 어느 날 공조 전서(정3품) 이우가 기이한 짐승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구경갔다가 그 꼴이 추하다고 비웃고 침을 뱉었는데 성난 코끼리가 발로 밟아 죽인 사건이 발생했다. 태종 13년(1413) 11월 5일 「태종 실록」은 코끼리 재판을 다루고 있다. 병조 판서 유정현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일본에서 바친 이 코끼리는 임금이 애완하는 물건도 아니요, 나라에 이익도 없습니다. 지금 두 사람이 코끼리 때문에 죽고 다쳤는데, 만약 법으로 따지자면 사람을 죽인 죄로 이 짐승을 죽여야 마땅합니다. 또 일 년에 먹이는 콩이 거의 몇백 섬에 이르니 주공(周公)이 코끼리와 코뿔소를 몰아 내고 근검을 실천한 고사를 본받아 전라도의 섬에 두소서.

 
왕은 이 말을 그대로 따랐다. 사람 죽인 코끼리는 결국 전라도 순천 앞바다의 장도로 귀양갔다. 그러나 풀밖에 먹일 수 없는 섬은 코끼리를 기르기에 적당한 곳이 아니었다. 코끼리를 불쌍히 여긴 태종은 뭍으로 내보내 기르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육지 또한 코끼리가 살기에 알맞은 환경이 못 됐다.


세종 2년(1420) 12월 28일 전라도 관찰사는 코끼리의 순번제 사육을 제안하는 보고서를 올린다. 당시의 상왕 태종은 이 제안을 그대로 따랐다고 한다. 다시 「세종 실록」을 보자.

 
코끼리란 것이 쓸 데에 유익한 점이 없거늘, 지금 도내 네 곳의 변방 지방관에게 명해 돌려 가면서 먹여 기르라 했으나, 폐해가 적지 않고 도내 백성들만 괴로움을 받고 있습니다. 청컨대 충청·경상도까지 아울러 명해 돌아가면서 기르도록 하게 하소서.

 
이 코끼리의 말로가 어떠했는지 기록에는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전라도 관찰사의 제안은 받아들여져 코끼리는 곧 충청도로 보내졌다. 1년 뒤 충청도 관찰사는 엄청나게 먹어 대는 코끼리의 먹이를 대기 힘들 뿐 아니라 코끼리를 돌보는 노비마저 밟혀 죽었다면서 코끼리를 다시 섬으로 보내게 해 줄 것을 요청했다.


코끼리 한 마리를 사육하는 데 온 나라가 쩔쩔매는 모습이다. 이 속에서 당시의 피폐한 경제 상황을 읽을 수 있다. 오늘날 먹이를 줄 수 없어 코끼리를 못 기르는 나라는 거의 없다. 그 대신 우리의 애완견 먹이보다 못한 식사를 하며 굶주리고 있는 사람들이 전세계에 1억 명이 넘는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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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18 20:18 2009/10/18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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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 유교를 통치 이데올로기로 도입한 이래 여성들의 삶은 어항 속의 물고기 또는 감옥 안의 죄수와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유교 문화가 완전히 뿌리 내리기 전인 조선 초기의 활달한 생활 양식에 관한 기록은 많이 남아 있지 않다. 다만 도덕면에서 비난으로 얼룩진 몇몇 스캔들만이 당시의 자유 분방한 여성 현실을 간접적으로 말해 줄 뿐이다. 3류 소설이나 영화의 주인공으로서 오늘날까지 많은 남성들을 즐겁게 해 주고 있는 유감동 또한 활달한 조선 초기 여인의 특수한 사례다.

명예 서울 시장을 지낸 유귀수의 딸로서 무안 군수 최중기에게 시집 간 유감동은, 남편이 평강 현감으로 부임하고 있을 때 병을 핑계로 서울로 올라와서는 그 뒤 전설이 되어 버린 간통 행진을 계속하게 된다. 세종 9년(1427) 8월의 「세종 실록」에 기록된 것만 해도 유감동과 관계를 맺은 고위 관료는 38명이나 된다. 특히 그녀는 영의정 정탁과 관계하면서 그의 조카인 이조 판서 정효문과도 정을 나누었고, 시누이의 남편인 정3품 벼슬아치 이효랑과도 관계해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김종서 장군은 바로 이 점을 문제 삼아 “정효문은, 그의 숙부 정탁이 간통했는데 이를 알면서도 고의로 범했고, 이효량은 최중기의 매부이면서 간통했습니다. 두 사람의 행실이 짐승과 같으니 모름지기 추궁해 다스리소서” 하며 세종에게 진언했다. 그러나 워낙 많은 고관 대작들이 관계된 사건인지라 세종도 어쩔 수 없었다. 왕의 답변을 들어 보자.

이 여자를 더 심문할 필요가 없다. 이미 간부가 십몇 명이 나타났고 또 재상도 끼여 있으므로 일의 윤곽이 벌써 다 이루어졌으니 이것을 가지고 죄를 결정해도 될 것이다. 다시 더 심문한다 하더라도 이 여자가 어떻게 모두 기억할 수 있겠는가. 정효문은 숙부 일은 알지 못하고 간통했다고 말했고, 또 공신의 아들이니 다시 심문하지 말라.

 
세종은 또 사헌부에 이르기를, 서울에 거주하는 자는 직접 심문하되 지방으로 부임한 사람은 잡아오지 말고 처리하도록 지시했다. 사건을 축소시키려는 것이다. 이 여파는 유감동의 처벌에도 영향을 미쳤다. 한 건의 간통으로 죽음을 당하던 시대였지만 유감동은 먼 지방으로 쫓겨나는 데 그쳤다. 물론 유감동은 변방으로 유배 가서도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한 것으로 「세종 실록」은 전한다.


유감동의 타락은 지탄받을 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38명의 고관 대작들을 놔 두고 유감동에게만 돌을 던질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오히려 그녀는 문란한 행각을 법적으로 보장받던 남성 위주의 사회에 반기를 든 용감한 여성으로 기억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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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18 20:02 2009/10/18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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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회찬

자유인,문화인,평화인 진보신당 대표 노회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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