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건주의 유교 국가인 조선에서 여성의 사회적 지위와 역할은 거의 무에 가까웠다. 음식을 만들거나 바느질하는 일 또는 술자리 시중을 드는 일과 같은 천한 일은 여성이 도맡아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전문 지식과 기술을 갖는 일에 여성이 종사하는 경우란 거의 없었다. 한 마디로 ‘직업을 가진 여성’은 없었다. 다만 사람의 몸을 돌보는 의사와 사건을 수사하는 형사의 역할을 맡는 여성이 일부 있었는데, 이는 그 직업의 특수한 필요에 따른 것으로 아주 드문 일이었다. 조선 시대에 여자 의사는 의녀라 불렀고, 여자 형사는 다모라 불렀다. 그런데 이처럼 여자 의사와 여자 형사 제도가 시행된 것은 여성의 권리가 늘어났기 때문이 아니었다. 반대로 남녀의 구분이 엄격했던 데 따른 결과였으니 참으로 역설적인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의녀 제도가 실시된 것은 조선 초기부터였다. 남녀 구별이 엄격한 유교 사회에서 부인의 병을 남자 의사가 진찰하고 치료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우선 궁중에서 이 같은 여자 의사의 수요가 컸다. 그리하여 태종 18년(1418)에는 궁궐에 7명의 의녀를 두었다. 그 뒤에도 어린 여자아이를 선발해 제생원에 맡겨 국가의 지원으로 의술을 익히게 했다. 전문인인 의녀의 역할을 망가뜨린 이는 연산군이었다. 연산군 시절 의녀는 기생의 역할까지 도맡게 된 것이다. 연산 10년(1504) 6월 13일 「연산군 일기」를 보자.

 
잔치 때 의녀 80명을 가려 뽑아 예의를 가르치고, 재주 있는 기생은 옷을 깨끗이 입혀서 어전의 섬돌 위에 앉혀라.

 
의녀가 기생처럼 술자리에 불려다닌 것은 궁중에서만이 아니었다. 사대부 집의 잔치에도 의녀가 넘실거렸다. 선조 38년(1605) 4월 10일의 「선조 실록」에는 이를 규탄하는 혜민서 관리들의 말이 기록되어 있다.

 
의녀를 뽑은 것은 의술을 가르쳐 나라에서 쓰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규율이 흐트러지고 사치 풍조가 널리 퍼져 마을의 크고 작은 술잔치에 의녀를 부르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어느 겨를에 의녀의 얼굴을 마주하고 의술을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물론 의녀가 의사 역할 이외에 기생 역할만 한 것은 아니었다. 궁중에서 형사 사건을 처리하는 데도 규방을 수색하거나 염탐하는 따위 남자가 하기 어려운 일을 의녀에게 맡겼다. 의녀가 여형사 역할까지 한 것이다. 광해군 5년(1613) 6월 13일의 「광해군 일기」를 보자.


영의정 이덕형이 아뢰었다.

 
“평상시에 사대부들 집에서 사람을 붙잡아 올 때는 이따금 의녀들에게 들어가 염탐해 보게 했습니다. 그러니 지금도 이 관례에 따라 의녀에게 대비전의 궁녀를 찾아보게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러자 왕이 승지에게 명령했다.

“영의정의 말에 따라 수문장과 선전관을 많이 정해 다른 사람들은 드나들지 못하도록 엄격하게 금지한 뒤에 의녀가 들어가 찾아서 잡아 오도록 하라.”

 
특히 광해군은 의녀를 여자 형사로 활용하는 데 열심이었다. 이듬해 7월 27일에도 광해군은 폐위된 임해군의 기생 환어사가 민간 집으로 몸을 숨기자 의녀에게 “갖은 방법을 써서 수색해 잡으라”는 명령을 내린다. 그러나 의녀의 여자 형사 역할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사실 그 전부터 이러한 관례에 대한 문제 제기가 있었던 것이다. 「중종 실록」에는 중종 21년(1526) 2월 15일 왕이 직접 이러한 문제점을 지적하는 기록이 있다.

 
생각해 보니 의녀를 둔 것은 병을 치료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지금 포도 대장을 따라가 사대부의 집을 수색하는 것은 의녀를 둔 본래의 뜻과 다르다. 이것은 새로운 기준을 세우는 것이라 의논이 필요하니 담당 관리를 불러 의논하라.


의녀 제도는 조선 말기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조선 중기 이후 의녀가 기생이나 여자 형사 노릇까지 떠맡는 사례는 거의 줄어들었다. 동시에 이 때부터 다모라는 여자 형사가 등장해 궁중은 물론 일반 민간인들의 형사 사건에 투입되었다. 다모란, 형식적으로는 관청에서 식모 노릇을 하는 여자 노비를 일컫는 말이었다. 그러나 조선 중기 이후 다모는 의금부·형조·포도청에서 특수한 임무를 맡아 왔다. 그리하여 다모를 뽑을 때는 키가 5척이 되어야 하고, 막걸리 세 사발을 단숨에 마실 수 있어야 하며, 쌀 다섯 말을 번쩍 들 수 있어야 한다는 말까지 생겨났다.

 
다모에게 맡겨진 일차 임무는 수색과 염탐이었다. 정조 14년(1790) 9월 7일의 「정조 실록」을 보자. 이 날 왕은 내수사(궁중에서 쓰일 물품과 노비의 관리를 담당하던 관청) 관원이 궁인을 가마에 태워 가는 것을 검문한다며 소동을 벌인 파주 목사 겸 적성 현감 홍상덕을 질책하고 있다.

 
명령을 받든 행차를 어찌 감히 막는단 말인가. 그 현감을 잡아다 신문하고 엄중히 처리하라. 이미 명령을 받든 관원에게 가마의 휘장을 활짝 걷어올리게 하고 그 고을 다모를 불러다가 궁인의 모습을 확인하도록 했다. 정말로 죄인이라면 어찌 이같이 의혹을 풀어 주는 일을 하겠는가. 그렇다면 감사의 보고가 너무도 형편없지 않은가. 이것은 책임이나 때우려는 꾀이며 남을 흉내내는 일일 뿐이다. 이 사람이 어찌 감히 이처럼 눈가림하는 수단을 쓴단 말인가. 감사를 해임하도록 하라.

 
또한 정조 17년(1793) 1월 12일 왕은 무예를 한 사람들과 무예 별감으로 장교를 지낸 사람 50명을 가려서 돌아가면서 명정전 남쪽 회랑에서 숙직하게 했다. 이를 장용위라 불렀고, 그들을 관리하기 위해 장용청을 설치했다. 이른바 경호실을 만든 것이다. 장용청에는 이들 장교급 무관 외에도 이들의 업무를 지원하는 여러 직종의 사람들도 배치했다. 그런데 이들의 명단에 다모 2명도 떳떳이 적혀 있는 것으로 미루어, 여자 형사인 다모의 역할이 일반화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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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18 23:01 2009/10/18 2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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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실록」에는 임진 왜란으로 전 국토가 유린되던 당시의 참상을 그린 한 폭의 그림에 대해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당시 사람 중에 「유민도(流民圖)」를 그려 올린 자가 있었다. 그 그림에는 죽은 어미의 젖을 물고 있는 아이도 있었고, 상처를 입고 쓰러져 있는 자도 있었고, 구걸하는 사람도 있었고, 자식을 버려 나무 뿌리에 묶어 놓은 어미도 있었고, 말을 할 수 없어서 손으로 입을 가리키는 자도 있었고, 나뭇잎을 따서 배를 채우는 자도 있었고, 남의 하인이 되기를 구걸하는 사대부도 있었고, 마른 해골을 씹어 먹는 자도 있었고, 부자 간에 함께 누워 있는 사람들도 있었고, 아이를 업고 비틀거리는 어미도 있었다.

 
어느 시대에나 전쟁이 벌어지면 가장 참혹한 처지에 놓이는 것은 여자와 아이였다. 선조 31년(1598) 3월 1일의 「선조 실록」은 그 무렵 수없이 벌어졌을 사건 가운데 하나를 소개하고 있다.

 
도승지 신식의 딸 신씨는 왜적에게 시부모가 살해당하고 신씨는 남편의 첩과 함께 사로잡히게 되었다. 왜적이 그의 나이가 어린 것을 보고 끈으로 묶어 함께 끌고 가려고 했다. 신씨는 빠져나가지 못할 것을 알고 눈물을 흘리며 첩에게 “나의 뜻은 본디 정해졌다. 죽는 것 외에는 다른 도리가 없다. 너는 꼭 죽을 필요가 없으니 우선은 그대로 따라갔다가 다시 돌아오기를 도모하라”고 말했다.

 
그러고나서 칼을 빼어 들고 소리를 높여 왜적을 꾸짖기를 “내가 어찌 감히 너를 따라가 살겠는가. 빨리 나를 죽여라” 하며, 오른손으로는 칼을 잡고 왼손으로는 나무를 휘어잡고는 소리를 더욱 매섭게 질렀다. 왜적이 노해 그의 오른쪽 어깨를 치자 땅에 쓰러져 절명했다. 그의 여종이 주인 아기를 업고서 곁에 숨어 있다가 주인이 해를 당하는 것을 보고, 나와 끌어 안자 적이 아울러 살해했다. 그 첩이 끝내 적중으로부터 도망쳐 돌아와 그 전말을 이야기했는데, 그 절개에 탄복해 흐느낌을 멈추지 못했다.

 
인간의 존엄과 품위를 지키기 어려운 위기 상황에서는 인간의 동물적인 생존 본능이 더욱 강하게 드러나기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됨됨이는 오히려 위기 상황에서 더욱 잘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임진 왜란이 시작된 이듬해인 선조 26년(1593) 5월 26일의 「선조 실록」은 살기 위해 직무를 방기한 한 사대부를 고발하고 있다. 사헌부가 올린 글을 보자.

 
왜적이 서울에 들어와 점거하던 때 전에 정랑(육조의 정5품 벼슬)이었던 유덕종은 “성안에 몰래 들어가 내통(內通)하겠다”고 하고 무지한 주민들과 태연하게 거처하면서 조사해 보고하는 일은 하지 않고 단지 살기를 꾀하려는 계책을 했으니, 사대부의 도리를 더럽힘이 심합니다. 그를 사판(관리의 명부)에서 삭제시키소서.

 
당시 참혹한 위기 상황에서 본분과 직무를 유기한 사대부들이 많아 죽음으로 절개를 지킨 여인들과 아주 대조적인 모습을 보인다. 위 사건을 기록한 사관의 평가와 관점이 재미있다.

나랏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목숨을 버려 의리를 지킨 사대부들은 아주 적었지만, 죽기를 맹세하고 정조를 지킨 여자들은 곳곳마다 있었다. 우리 나라 사대부 집안의 여자들은 평생 동안 한 남편만을 섬기는 것이 그들의 관습이라서 난리를 만난 때에도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 있었다. 그러나 사대부들은 평소의 소양이 의리는 알지 못하고 이익만을 추구했기 때문에 생사가 걸려 있는 즈음에 마음이 흔들렸던 것이다. 풍속이 국가적 문제에 이러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노회찬과 함께 읽는 조선왕조실록, 도서출판 일빛,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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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18 22:25 2009/10/18 2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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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의 깨끗한 바닷물로 간을 맞춘 초당 두부는 이제 전국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강릉의 특산물이다. 16세기 중엽 초당(草堂) 허엽(1517∼80년)이 강릉 부사(정3품, 오늘날의 시장)로 있을 때였다. 당시 관청 앞마당에 샘물이 있었는데 물맛 좋기로 이름나서 이 물로 두부를 만들고 바닷물로 간을 맞췄다. 이렇게 만든 두부였기에 맛이 좋기로 소문이 났다. 그러자 허엽은 자신의 호를 붙여 초당 두부라 이름짓고 이 두부를 팔아 큰 돈을 벌었다. 샘물이 있던 자리는 강릉시 초당동이며 그 곳에는 지금도 허엽을 기리는 비석이 있다.

초당 허엽은 당대의 논객으로 경상도 관찰사(종2품, 오늘날의 도지사)를 지냈다. 그러나 관운은 그리 좋지 않아 한 번은 횡령으로, 또 한 번은 조광조를 복권시켜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고 파직되기도 했다. 이처럼 허엽은 이재에도 밝은 한편, 정2품 동부승지까지 역임하면서도 평탄치 않은 관직 생활을 한 독특한 경력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이러한 허엽의 생애도 그의 자식들만큼 유명하지도, 파란 만장하지도 않다. 허엽은 두 명의 부인으로부터 3명의 아들과 3명의 딸을 두었는데 강릉 부사 때 낳은 딸이 조선 시대 최고의 여류 시인 허난설헌이며 6년 뒤 경상도 관찰사 때 낳은 아들이 『홍길동전』을 쓴 허균이다.

장남인 허성은 임진 왜란 직전에 일본의 정세를 파악하기 위해 선조가 파견한 3명의 사절단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이 때 동행했던 김성일이 일본의 침략 가능성을 부인한 반면 허성은 황윤길과 함께 침략 가능성을 경고한 사실로 유명하다.

차남인 허봉은 그의 동생 허난설헌·허균과 마찬가지로 많은 글을 남긴 탁월한 문필가였다. 그는 한때 명나라 사신으로 갔으나 당시의 병조 판서인 이이를 비판하다가 오히려 유배를 당하기도 했다. 그 후 다시 벼슬이 내려졌는데 허봉은 이를 거절하고 금강산으로 들어가는 등 유랑 생활로 일생을 마감했다.
선조 13년(1580) 2월 1일의 「선조 실록」은 63살로 죽은 허엽의 사망 내용과 생애를 기리는 데 한 페이지를 할애하고 있다. 그 일부를 보자.

허엽은 직언을 잘했지만 실무에는 약해 왕이 그리 중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경상도 감사가 된 후 평판이 좋아 장차 크게 등용하려 했다. 그런데 허엽은 말년에 창기를 매우 가까이 했고, 결국 병으로 해직되어 돌아오다가 상주의 객지에서 죽었다.
 
인생의 말로를 비참하게 마감했고 아들 허균의 역모 사건으로 가문도 몰락했지만, 허엽에 대한 좋은 평판은 그 후에도 계속되었다. 인조 1년(1624) 5월 11일 왕이 신하들과 선비의 교육 문제로 대화하는 자리에서였다.
지사 신흠이 아뢰었다.

“선비를 기르는 책임은 전적으로 대사성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적임자를 얻은 뒤에야 선비의 풍습을 바로잡고 훌륭한 인재를 기를 수 있습니다. 선왕조 때에는 오직 허엽과 구봉령이 적임자였습니다. 지금 자리가 비어 있으니, 지위에 구애받지 마시고 반드시 적임자를 얻는 데 힘을 기울이소서.

”왕이 말했다.

“아뢴 대로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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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18 21:43 2009/10/18 2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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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4월 13일, 새벽 안개를 뚫고 왜구가 바다를 건너왔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20여만 명의 군사와 36명의 장수를 이끌고 몇만 척의 배로 침략한 것이었다. 왕이 보고를 받은 것은 나흘 뒤인 4월 17일 오후였다. 그 무렵 상황을 「선조 실록」을 통해 보자.

부산에서 망을 보던 관리가 처음에 먼저 온 400여 척의 배를 보고 본진영에 알렸다. 그런데 변장(邊將)은 단지 처음 보고받은 것만을 근거로 이를 실제 수효로 여겼다. 그리하여 병마 절도사(종2품 무관)는 “적의 배가 4백 척이 채 못 되는데 한 척에 실은 인원이 몇십 명에 불과하니 그 대략을 계산하면 약 1만 명쯤 될 것이다”라는 보고를 올렸다. 따라서 조정에서도 그렇게 여겼다.

왕은 즉각 군사를 내려보내 방어에 나서도록 했다. 그러나 서울에서 내려간 정예병들도 죽거나 도망치는 패전을 거듭했다. 4월 28일 충주 전투에서 명장 신립 장군이 패배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조정은 전의를 상실했다. 서울을 버리고 피난 가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그 반대도 만만치 않았다. 『조선 왕조 실록』을 보자.

신하가 아뢰되 “전하께서 일단 도성을 나가시면 인심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전하의 가마를 맨 인부도 길가에 가마를 내버려 둔 채 달아날 것입니다”라며 목놓아 통곡하니 임금은 얼굴빛이 변해 내전으로 들어갔다.
 
4월 29일 여전히 찬반이 떠들석했으나 왕은 파천(왕이 왕궁을 버리고 피난 가는 일)을 결정했다. 상황은 이미 위기로 치닫고 있었다. 선조 25년(1592) 4월 29일의 실록은 그 광경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이 날 밤 호위하는 군사들은 모두 달아나고 궁문엔 자물쇠가 채워지지 않았으며 궁중의 물시계는 시간을 알리지 않았다.

4월 30일 새벽,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 속에서 왕은 피난을 떠났다. 대열은 채 백 명도 되지 않았다. 점심은 벽제에서 먹었는데 왕자들도 반찬 없이 맨밥을 먹었다. 저녁 무렵 임진강 나루에 도착해 강을 건너는 모습도 「선조 실록」은 전하고 있다.

저녁에 임진강 나루에 닿아 배에 올랐다. 왕이 신하들을 보고 엎드려 통곡하니 좌우가 눈물을 흘리며 감히 쳐다보지 못했다. 밤이 칠흑같이 어두운데 한 개의 등촉도 없었다.

동해안과 남해안에서 왜구가 자주 침탈했고, 왜적의 대대적인 침략을 경고하는 보고도 있었다. 따라서 이는 무방비와 안일에 젖은 지배 세력이 자초한 비극이었다.

비록 교통과 통신이 제대로 발달하지 못한 시절이었지만 외적의 침략에 대비한 봉화 제도는 이미 확립되어 있었다. 봉수대의 다섯 개 굴뚝에 각각 다른 수의 불을 때어 외적의 침입 정도를 몇 단계로 나누어 보고하는 봉화 제도는 조선 초기부터 중시된 것이었다. 왜적이 부산 앞바다로 침입해 온 임진 왜란의 경우 부산 다대포에서 경상도, 충청도와 경기도 광주 천림산을 거쳐 다시 서울 남산 봉수대로 이어지는 남방 루트를 통해 봉화가 전파되었어야 했다. 이 때 봉홧불이 제대로 올랐다면 서울에선 하루만에 전쟁 발생을 알았을 것이다.

북진해 오는 왜적에 대비하고 서울을 방비하는 데 사흘이라는 아까운 시간을 허비한 결과는, 밤비를 맞으며 왕이 서울을 버리고 가는 비극으로 나타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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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18 21:17 2009/10/18 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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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가평에 사는 김희약이라는 어린아이가 그의 할아버지가 호랑이에게 잡힌 것을 보고 도끼 자루로 호랑이를 쳐서 할아버지를 구한 사건이 일어났다. 명종 14년(1559) 3월 4일의 「명종 실록」은 경기도 관찰사가 이 사건을 보고하면서 김희약 어린이를 표창해 줄 것을 청원했으며, 왕이 예조에 명령을 내렸다고 적고 있다. 언뜻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관찰사가 조정에 보고하기까지 한 것으로 미루어 사실일 가능성이 크다. 어린아이의 용맹성도 놀랍지만 이 사건은 “어린아이가 호랑이를 잡을 만큼 호랑이가 많았다”는 이야기도 될 수 있다. 실제 호랑이의 습격으로 생기는 인명 피해와 호랑이 퇴치를 위해 나라에서 벌이는 사냥은 『조선 왕조 실록』에 자주 등장한 사건이다.


당시 조선에 호랑이가 어느 정도 많았는가 하는 것은 흰 호랑이 출몰 사건을 보더라도 알 수 있다. 선조 4년(1571) 10월 27일 흰 호랑이가 경기도 고양 지역에 나타나 사람과 가축 4백여 마리를 죽였다 이 때문에 조정에서는 대대적인 포획에 나섰다. 이 때 호랑이 포획령으로 전국에서 잡힌 호랑이는 모두 일곱 마리나 되었다. 그러나 포획을 중단한 것은 많이 잡았기 때문이 아니었다. 같은 해 11월 12일의 「선조 실록」을 보자.


이번에 동도와 서도의 착호 대장(호랑이 포획 대장)이 군사들을 잘 통제하지 못해 민간에 들어가 노략질하고 소란스러운 일을 일으켰다. 이 때문에 왕이 호랑이 잡는 일을 중단하게 했다. 이 날 서도(평안도와 황해도)에서 큰 호랑이 두 마리를 잡고 경기도 광주에서 다섯 마리를 잡았다.

 
북한산과 인왕산에 호랑이가 나타났다는 기록은 조선 후기에도 등장하지만 그 무렵에는 호랑이가 궁궐에까지 내려왔다. 임진 왜란 때 조선에 침략한 왜군의 장수들이 호랑이 사냥에도 열을 올렸다고 한다. 전쟁이 끝난 지 10여 년 뒤인 선조 40년(1607) 7월 18일 왕은 창덕궁에 출몰하는 호랑이를 잡지 못하는 신하들을 매섭게 꾸짖으며 반드시 잡도록 지시했다.

 
내가 듣건대, 창덕궁 안에서 어미 호랑이가 새끼를 쳤는데 그 새끼가 한두 마리가 아니라고 한다. 발자국을 찾아 잡도록 이미 지시를 내렸다. 지금처럼 초목이 무성한 때에는 군대를 풀어 잡기 어렵다고 하더라도 발자국을 찾아 내 호랑이를 없애는 방법이야 어찌 없겠는가. 부지런히 발자국은 찾아 내지 않고 말만 꾸며서 책임만 면하려 하고 있다. 이는 작은 일이기는 하지만 우리 나라 사람들이 이같이 모든 일에 허풍만 떨고 용맹스럽지 못하다는 것을 미루어 알 수 있다. 아직까지 짐승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 남왜(일본)·북적(북쪽 오랑캐)과 마주치면 바람에 이는 먼지만 보고도 정신을 잃고 군대를 이끌고 도망가는 것을 이상하게 여길 것도 없다. 그리고 “호랑이 새끼를 길러 근심을 부른다”고 옛 사람이 경계했다. 만약 밤중에 나타나서 시내 민가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틀림없이 와전되어 많은 사람을 현혹시키는 폐단이 생길 것이다. 병조에게 군사를 많이 내고 군령을 더욱 엄하게 해 반드시 잡게 하라.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무섭다”는 옛말처럼, 그 무렵 백성들을 더 괴롭힌 것은 호랑이가 아니라 정치인과 그들의 통치였을지도 모른다. 「선조 수정 실록」에는 이런 기록이 적지 않다.

 
경기 지방에 호랑이의 피해가 많아 장수에게 명령해 군사를 일으켜서 사냥하게 했다. 그런데 사졸들이 민가를 침탈해 민간의 고통이 호랑이에게 받은 것보다 더 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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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18 19:53 2009/10/18 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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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관이 궁중에서 일하며 사초를 기록할 때 꼭 왕의 언행만을 적는 것은 아니었다. 『조선 왕조 실록』의 곳곳에는 신하들이 한 말은 물론이거니와 그들의 인품과 행위에 관한 사관들의 평가도 여기저기서 발견된다. 그리하여 한때 위세를 날리던 고관 대작들에 대해서도 비록 면전에서 허물을 들추지 못했다 할지라도, 뒷날 실록을 작성할 때 그들에 대한 세간의 평가가 사관의 입을 빌어 기록되곤 했다. 그 가운데 재미있는 것은 화장실에 낙서한 일이 폭로된 권진의 경우다.

선조 34년(1601) 8월 13일의 「선조 실록」에는 왕이, 구성을 성균관 대사성으로, 최기를 승정원 동부 승지로, 박진원을 시강원 문학으로, 권진을 형조 정랑으로 임명했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이 기록의 끝부분에 형조 정랑 권진에 대한 사관의 인물평이 붙여져 있다.

권진은 반목이 심하고 사악했다. 유생일 때에 일찍이 이산해와 홍여순의 사람됨을 미워해, 산사에서 독서하면서 변소에 두 사람의 이름을 붙여 놓고는 변소에 갈 때면 반드시 그 이름을 불러 천시하고 미워하는 뜻을 나타냈다. 그러나 급제해서는 먼저 이산해에게 붙었고, 그 뒤 이산해를 배반하고 다시 홍여순에게 붙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침을 뱉었다.

 


사관에 따르면 권진은 요즘에도 흔히 볼 수 있는 아주 민첩한 기회주의자인 것 같다. 그러나 그러한 권진도 화장실에 남긴 자신의 낙서가 4백여 년 뒤까지 전해질 줄은 정녕 몰랐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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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18 18:16 2009/10/18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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