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의녀 제도가 실시된 것은 조선 초기부터였다. 남녀 구별이 엄격한 유교 사회에서 부인의 병을 남자 의사가 진찰하고 치료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우선 궁중에서 이 같은 여자 의사의 수요가 컸다. 그리하여 태종 18년(1418)에는 궁궐에 7명의 의녀를 두었다. 그 뒤에도 어린 여자아이를 선발해 제생원에 맡겨 국가의 지원으로 의술을 익히게 했다. 전문인인 의녀의 역할을 망가뜨린 이는 연산군이었다. 연산군 시절 의녀는 기생의 역할까지 도맡게 된 것이다. 연산 10년(1504) 6월 13일 「연산군 일기」를 보자.
잔치 때 의녀 80명을 가려 뽑아 예의를 가르치고, 재주 있는 기생은 옷을 깨끗이 입혀서 어전의 섬돌 위에 앉혀라.
의녀가 기생처럼 술자리에 불려다닌 것은 궁중에서만이 아니었다. 사대부 집의 잔치에도 의녀가 넘실거렸다. 선조 38년(1605) 4월 10일의 「선조 실록」에는 이를 규탄하는 혜민서 관리들의 말이 기록되어 있다.
의녀를 뽑은 것은 의술을 가르쳐 나라에서 쓰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규율이 흐트러지고 사치 풍조가 널리 퍼져 마을의 크고 작은 술잔치에 의녀를 부르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어느 겨를에 의녀의 얼굴을 마주하고 의술을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물론 의녀가 의사 역할 이외에 기생 역할만 한 것은 아니었다. 궁중에서 형사 사건을 처리하는 데도 규방을 수색하거나 염탐하는 따위 남자가 하기 어려운 일을 의녀에게 맡겼다. 의녀가 여형사 역할까지 한 것이다. 광해군 5년(1613) 6월 13일의 「광해군 일기」를 보자.
영의정 이덕형이 아뢰었다.
“평상시에 사대부들 집에서 사람을 붙잡아 올 때는 이따금 의녀들에게 들어가 염탐해 보게 했습니다. 그러니 지금도 이 관례에 따라 의녀에게 대비전의 궁녀를 찾아보게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러자 왕이 승지에게 명령했다.
“영의정의 말에 따라 수문장과 선전관을 많이 정해 다른 사람들은 드나들지 못하도록 엄격하게 금지한 뒤에 의녀가 들어가 찾아서 잡아 오도록 하라.”
특히 광해군은 의녀를 여자 형사로 활용하는 데 열심이었다. 이듬해 7월 27일에도 광해군은 폐위된 임해군의 기생 환어사가 민간 집으로 몸을 숨기자 의녀에게 “갖은 방법을 써서 수색해 잡으라”는 명령을 내린다. 그러나 의녀의 여자 형사 역할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사실 그 전부터 이러한 관례에 대한 문제 제기가 있었던 것이다. 「중종 실록」에는 중종 21년(1526) 2월 15일 왕이 직접 이러한 문제점을 지적하는 기록이 있다.
생각해 보니 의녀를 둔 것은 병을 치료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지금 포도 대장을 따라가 사대부의 집을 수색하는 것은 의녀를 둔 본래의 뜻과 다르다. 이것은 새로운 기준을 세우는 것이라 의논이 필요하니 담당 관리를 불러 의논하라.
의녀 제도는 조선 말기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조선 중기 이후 의녀가 기생이나 여자 형사 노릇까지 떠맡는 사례는 거의 줄어들었다. 동시에 이 때부터 다모라는 여자 형사가 등장해 궁중은 물론 일반 민간인들의 형사 사건에 투입되었다. 다모란, 형식적으로는 관청에서 식모 노릇을 하는 여자 노비를 일컫는 말이었다. 그러나 조선 중기 이후 다모는 의금부·형조·포도청에서 특수한 임무를 맡아 왔다. 그리하여 다모를 뽑을 때는 키가 5척이 되어야 하고, 막걸리 세 사발을 단숨에 마실 수 있어야 하며, 쌀 다섯 말을 번쩍 들 수 있어야 한다는 말까지 생겨났다.
다모에게 맡겨진 일차 임무는 수색과 염탐이었다. 정조 14년(1790) 9월 7일의 「정조 실록」을 보자. 이 날 왕은 내수사(궁중에서 쓰일 물품과 노비의 관리를 담당하던 관청) 관원이 궁인을 가마에 태워 가는 것을 검문한다며 소동을 벌인 파주 목사 겸 적성 현감 홍상덕을 질책하고 있다.
명령을 받든 행차를 어찌 감히 막는단 말인가. 그 현감을 잡아다 신문하고 엄중히 처리하라. 이미 명령을 받든 관원에게 가마의 휘장을 활짝 걷어올리게 하고 그 고을 다모를 불러다가 궁인의 모습을 확인하도록 했다. 정말로 죄인이라면 어찌 이같이 의혹을 풀어 주는 일을 하겠는가. 그렇다면 감사의 보고가 너무도 형편없지 않은가. 이것은 책임이나 때우려는 꾀이며 남을 흉내내는 일일 뿐이다. 이 사람이 어찌 감히 이처럼 눈가림하는 수단을 쓴단 말인가. 감사를 해임하도록 하라.
또한 정조 17년(1793) 1월 12일 왕은 무예를 한 사람들과 무예 별감으로 장교를 지낸 사람 50명을 가려서 돌아가면서 명정전 남쪽 회랑에서 숙직하게 했다. 이를 장용위라 불렀고, 그들을 관리하기 위해 장용청을 설치했다. 이른바 경호실을 만든 것이다. 장용청에는 이들 장교급 무관 외에도 이들의 업무를 지원하는 여러 직종의 사람들도 배치했다. 그런데 이들의 명단에 다모 2명도 떳떳이 적혀 있는 것으로 미루어, 여자 형사인 다모의 역할이 일반화했음을 알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