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은 선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왕이 된 광해군을 기다리는 것은 임진 왜란으로 피폐해진 나라 경제, 중국 대륙에서 새로이 발흥하는 후금 세력과 명나라 사이의 패권 전쟁을 앞두고 고조되는 국제적 긴장, 세자 시절부터 시작되어 왕위에 오른 뒤에도 계속되는 배다른 왕자들의 왕권 찬탈 음모 따위였다. 광해군은 후금과 명나라의 세력 관계를 이용한 등거리 외교와 부국 강병책으로 후세의 역사가들로부터 실리주의자, 현실주의자, 개혁가의 칭호를 받고 있다. 그러나 계모와 형제들을 처단하는 악역을 감수했는데도 계속되는 역모로부터 왕위를 지켜 내지 못했다.
1623년 3월 13일, 과거에 역모에 연루된 혐의로 대비에서 폐출된 인목 대비는 이 날 인조 반정을 일으킨 무리들에게 말한다.
먼저 이혼(광해군) 부자의 머리를 가져와서 내가 직접 살점을 씹은 뒤에야 책명을 내리겠다.
그러자 신하들은 “예로부터 왕을 내쫓고 가둔 일은 있어도 죽이지는 않았다”며 인목 대비를 진정시켰다. 이렇게 해서 광해군의 유배 생활이 시작되었다. 1623년 왕위에서 쫓겨난 광해군은 18년이나 더 살다가 1641년 66살로 세상을 하직했다. 연산군이 중종 반정으로 물러난 뒤 2개월만에 강화도에서 30살의 나이로 숨을 거둔 데 비해 꽤 오래 수를 누린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왕위에서 물러난 광해군의 여생이 행복했던 것은 아니다. 사실은 정반대였다.
광해군은 처음에는 연산군과 마찬가지로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강화도에서 광해군의 아들과 며느리는 자결하고 부인은 병으로 죽었다. 홀로 남은 광해군의 유배 생활은 전혀 편할 수 없었다. 인조 반정으로 집권한 세력들은 왕권이 불안정하자 광해군을 살해하려는 시도를 자주 했다.
1624년 이괄의 난이 발생하자 광해군이 다시 왕위에 오를 가능성을 경계한 인조는 광해군을 태안으로 유배시켰다가 사태가 진정되자 다시 강화도에 보냈다. 1636년 병자 호란이 일어나고 청나라에서 광해군의 원수를 갚겠다고 하자 다시 강화도의 북서쪽에 있는 교동도로 유배지를 옮겼다. 그러다가 난리가 끝나자 후환을 막을 셈으로 교동도에 있는 광해군을 제주도로 유배 보냈다. 1641년 7월 1일 광해군은 제주도에서 위리 안치(집안에 가두고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함)된 가운데 죽었는데, 그의 나이 67살이었다.
광해군이 죽자 제주 목사로 있던 이시방이 즉시 열쇠를 부수고 들어가 예를 다해 염을 했는데, 나중에 조정의 ‘충신’들은 이시방의 행동을 ‘잘못된 일’로 규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광해군의 사망 소식을 실은 1641년 7월 10일의 「인조 실록」은 광해군이 교동에서 제주로 옮겨 갈 때에 지은 시 한 편을 소개하며 “이 때 듣는 자들이 모두 비감에 젖었다”면서 죽은 자를 위로하고 있다.
부는 바람 뿌리는 비 성문 옆 지나는 길
후덥지근 장독 기운 백 척으로 솟은 누각
창해의 파도 속에 날은 이미 어스름
푸른 산의 슬픈 빛은 싸늘한 가을 기운
가고 싶어 왕손초를 신물나게 보았고
나그네 꿈 자주도 제자주에 깨이네
고국의 존망은 소식조차 끊어지고
연기 깔린 강 물결 외딴 배에 누웠구나
조선 시대에는 두 번의 반정이 있었는데 연산군을 폐한 중종 반정과 광해군을 폐한 인조 반정이 그것이다. 반정이란 원래 발란 반정(撥亂反正)이란 말을 줄여 쓴 것이다. 곧 난세를 평정해 정상을 회복한다는 뜻이다. 「태조 실록」에서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을 발란 반정으로 표기하고 있는 것도 같은 뜻이다. 그래서 반정은 평화적인 왕권 교체가 아닌데도 정당성을 인정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연산군을 쫓아 낸 중종 반정과는 달리 광해군을 몰아 낸 인조 반정은 후세의 사가들에게 그 명분과 정당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과 관련해 계엄 사령관을 조사할 일이 있다”며 일으킨 12·12 사태가 결국 ‘일부 군인들의 권력 장악을 위한 불법 쿠데타’였던 것처럼, 인조 반정의 명분과 실제는 달랐다는 것이다.
인조 반정을 일으킨 세력들은 반정의 명분으로, 인목 대비를 폐하고 형제들을 제거한 광해군의 폭정과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저버린 점을 들고 있다. 그런데 광해군이 선조에 의해 세자로 책봉되는 과정과 그 뒤 왕위에 오르는 과정뿐 아니라, 왕이 된 이후에도 끊임없이 왕권 찬탈을 위한 모반 사건이 줄지어 일어났다. 더구나 왕의 형제들도 이런 모반에 연루되어 처벌받았기 때문에 이는 반정의 명분이 되기 어려웠다. 또한 차츰 약해져 가던 명나라 세력과 새롭게 커져 가는 후금(뒤에 청나라) 세력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며 실리에 따른 외교 노선을 구사하던 광해군의 정책을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배신하는 것으로 여기는 것 역시 반정의 명분은 될 수 없었다. 그것은 반정을 일으킨 세력들이 명나라에 지나치게 굴종하면서 청나라에 대항하다가, 결국 정묘 호란과 병자 호란 때 굴욕스런 항복을 한 사실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될 수 없다”는 주장이 있듯이, ‘성공한 반정’인 인조 반정으로 집권한 세력들은 광해군을 폭군으로 그려 냈고 이는 「인조 실록」에 반영되었다.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될 수 없다” 는 단호했던 검찰의 입장은, 비자금 사건으로 전직 대통령이 구속되고 여론이 악화되자 슬그머니 처벌이 가능하다는 입장으로 선회했다. 마찬가지로 ‘성공한 반정’인 인조 반정도 당대에는 성공을 거두었지만 후세의 역사가들로부터는 혹독한 비판을 면치 못하고 있다. 반정의 명분이 없었음은 물론 반정으로 집권한 세력들이 나라를 망치고 백성들에게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안겨 주었다는 것이다.
태조와 태종, 세조와 세종, 인조와 인종, 정조와 정종, 순조와 순종 들은 자칫 혼동하기 쉬운 조선 왕들의 이름이다. 이런 이름을 지을 때 조(祖)와 종(宗)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가? 일반적으로 창업을 한 왕에게는 ‘조’ 자를 붙이고 수성을 한 왕에게는 ‘종’ 자를 붙인다고 알려져 있다. 그래서 ‘조’가 ‘종’보다 격이 더 높은 것처럼 이해되고 있기도 하다.
조선 왕조의 27명의 왕 중에서 ‘조’ 자를 쓴 왕은 태조·세조·선조·인조·영조·정조·순조 해서 모두 7명이다. 태조는 이씨 왕조를 창건했기에 말 그대로 태조가 되었다. 반면 나머지는 모두 나라를 중흥시키거나 큰 국란을 극복하거나 혹은 반정을 통해 왕이 된 경우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조’와 ‘종’의 이러한 구분이 정확한 평가에 기초한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 실제 영조·정조·순조의 경우는 처음에 각각 영종·정종·순종으로 추서되었다가 나중에 다시 고쳐 부르게 된 이름이다. 따라서 태조를 제외하면 나머지 왕들의 이름에 붙는 조와 종은 격의 높고 낮음에 따른 것이 아니라, 그때 그때의 상황에 따랐다. 다만 분명한 것은 왕위를 박탈당해 왕자의 위치로 격하된 왕들의 경우에는 결코 조나 종을 붙이지 않았다. 연산군이나 광해군은 바로 왕자의 호칭이다.
비운의 왕 광해군은 왕위를 계승할 세자가 되는 데도 파란 곡절을 겪었다. 본디 선조는 열네 아들을 두었으나 왕비의 소생은 없었다. 부득이 서자 중에서 세자를 책봉해야 하는데 선조는 인빈 김씨의 둘째 아들 신성군을 마음 속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인품과 학식이 월등하다는 이유로 많은 대신들이 광해군을 추천하자 선조는 세자 책봉을 미루었다. 광해군에게는 장남인 친형 임해군이 있었지만 그는 무능하고 방탕하다 하여 일찍부터 논외의 인물이었다. 그러다 임진 왜란이 일어나자 만일을 대비해 세자 책봉을 서두르면서 가까스로 광해군은 세자가 되었다.
그 뒤 정비인 인목 왕후가 영창 대군을 낳자 선조는 다시 고민하게 되었다. 대신들도 영창 대군을 지지하는 쪽과 광해군을 지지하는 쪽으로 나뉘어 갈등이 증폭되어 갔다. 그러다가 선조가 급사하자 왕위 계승의 결정권은 왕후에게 넘어가게 되었는데 인목 왕후는 예상 밖으로 자신의 친아들을 제치고 광해군을 왕으로 책봉한 것이다.
그러나 일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번에는 중국에서 시비를 걸고 나섰다. 장자인 임해군이 살아 있는데 그 동생이 어떻게 왕이 되었는지 조사해야겠다고 했다. 왕이 이미 즉위해 있는데, 그의 형제를 만나 왜 왕이 안 되었는지 조사하겠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엄일괴·만애민이라는 두 명의 명나라 관리가 조선으로 건너왔다.
조정은 이 일로 시끄러워졌다. 당연히 대질시켜 사실대로 알게 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된 반면, 대질 조사 자체가 왕을 욕되게 하는 일이라는 반론도 있었다. 결국 명나라의 명령을 어찌 어길 수 있겠는가 하는 점에 모두 동의하고 말았다. 이제 누가 왕이 되는가 하는 것은 두 명의 명나라 조사관에게 달렸다. 「광해군 일기」는 명나라 사신 엄일괴와 만애민이 임해군을 찾아가 조사하는 과정을 기록하고 있다.
임해군 : 나는 일찍이 왜적에게 붙잡힌 적이 있어서 정신을 잃고 못된 행동을 했다. 또한 중풍에 걸려서 손발을 움직일 수 없다.
중국 사신 : 네가 반역을 도모하다 죄를 받은 것이 사실이냐?
임해군 : 아니다. 내가 병으로 정신이 혼몽했는데 노비들이 이러한 뜻을 가졌던 것 같으나 나는 몰랐다.
그러자 중국 사신은 그러냐고 하면서 대신에게 말하기를, “잘 보호하고 소흘히 대우하지 말라고 국왕에게 말을 전하시오”라고 했다.
「광해군 일기」는 이 기록과 함께 내막을 밝히고 있다. 중국 사신이 임해군을 조사하기 전에, 대신이 임해군을 찾아가 조사받을 때 답변할 말을 미리 가르쳐 주었는데 임해군이 그대로 따랐다고 한다. 그리고 엄일괴를 비롯한 중국 사신이 임해군의 말을 다 사실로 믿지는 않았지만, 타고난 성품이 탐욕스러워 몇만 냥의 은을 받고는 쉽게 조사한 뒤에 갔다는 것이다. 몇만 냥이라니 왕의 자릿값치고는 너무 싸지 않은가? 왕이 교체될 때마다 일일이 종주국인 중국의 인가를 받아야 했던 시절의 슬픈 이야기다.
은 몇만 냥을 뇌물로 챙기고 광해군의 왕위 계승을 눈감아 준 것처럼, 조선을 방문하는 중국 사신들은 대부분 은과 인삼으로 한 밑천 잡기에 혈안이 된 자들이었다. 중국 사신이 올 때마다 그들이 요구하는 은을 마련하기 위해 고민하는 왕과 대신들의 논의가 『조선 왕조 실록』 여기저기에 기록되어 있다.
광해군 2년(1610) 6월 왕세자 책봉을 위해 조선에 건너온 중국 사신 염등은 악명이 가장 높은 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는 갖은 구실로 뇌물을 요구했는데, 심지어는 은으로 된 사다리를 만들어 서울 남대문을 넘어가 칙서를 받들게 하고는 이것을 천교라 하면서, 은을 거두어들이는 기회로 삼기도 했다. 딱한 것은 조정의 대신들이었다. 「광해군 일기」는 증언한다.
좌의정 이항복 : 이 상황에서는 옛날의 사례니 의리니 예절이니 하는 것은 하나도 필요 없고 오직 그의 말대로 채워 보내는 길밖에 없습니다.
우의정 심희수 : 요즈음의 행위를 보니, 그는 사람이 아닙니다. 어찌 그와 더불어 논란하겠습니까. 서울에 들어오게 하는 것이 오늘날의 가장 중요한 관건이니, 그의 말에 따라 골짜기와 같은 욕심을 채워 주어야 하겠습니다. 다만 서울에 들어온 뒤에 온갖 구실로 뇌물을 요구해 그 수량이 5만 냥을 갖추어야 할 정도가 되면 아무리 빈약한 재정 상태를 넉넉하게 만들고자 해도 형편이 어렵습니다. 이런 판국에 이르러서는 참으로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조선 시대를 통틀어 허균만큼 파란 만장한 생애를 살고 간 인물은 찾기 힘들다. 그리고 허균의 성격만큼 복잡한 경우를 달리 찾기도 힘들다. 그는 일곱 차례나 관직에서 쫓겨났으면서도 ‘거사’를 위해 계획적으로 고위직까지 진출한 유일한 인물이다. 또한 세상을 뒤엎는 혁명 소설을 쓰면서 자신이 직접 ‘혁명’을 계획하고 실천한 세계에서도 몇 안 되는 ‘혁명가’였다.
그 결과 자신이 쓴 소설 『홍길동전』은 해피 엔딩으로 끝을 맺었지만 정작 작가의 최후는 비극으로 끝났다. 광해군 10년(1618) 8월 반역의 주모자로 몰린 허균은 두 팔과 두 다리, 머리와 몸통이 6개 조각으로 찢기는 능지 처참을 당한 것이다.
일곱 차례나 관직에서 쫓겨난 앞뒤 사정을 살펴보면 허균은 더욱 이해하기 힘든 인물이다. 1589년 누이 허난설헌이 죽은 슬픔을 딛고 생원 시험에 합격한 허균은 임진 왜란이 끝나고 질서가 회복되면서 실시된 1594년의 과거 시험에서 을과(두 번째 등급)로 급제했다. 평소 자유 분방한 행동으로 방탕자라는 비난을 받아 온 탓으로 관직 임용이 늦어졌다. 그런데 형의 도움으로 1597년 황해도 도사(종5품 벼슬, 오늘날의 부도지사)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허균은 서울의 기생들을 임지로 데려가 별장을 짓고 데리고 놀았다는 이유로 곧 파면되었다.
해직되어 서울로 돌아온 그는 이듬해인 1598년 보란 듯이 문과 중시(문과 급제자들을 대상으로 10년마다 시행하던 시험)에 장원 급제해 조정의 중요 문서를 다루는 관리로 임용되었다. 그러나 일 년도 못 가 방탕한 생활로 다시 해직되었다. 1601년 다시 복직되었으나 2년만에 양반의 품위를 손상한 자로 탄핵받아 관직을 박탈당했다. 예조 판서가 된 형의 도움으로 1604년 다시 복직되어 황해도 수안 군수와 성균관 전적(교관)을 거쳤다. 1607년 삼척 부사(요즘의 시장)로 있다가 불교에 심취해, 관청 안에서 염주를 목에 걸고 일하는가 하면 걸승 흉내를 내기도 해 유교 사회에 정면으로 도전했다는 이유로 다시 쫓겨났다.
네 번째 해직된 그는 1608년에 공주 부사로 복직되었는데 임지에 가자마자 탄핵을 받아 함경도로 유배되고 말았다. 1610년에는 시험 감독관으로 있으면서 친구와 친척들을 우선 합격시키는 부정 행위를 저질렀다는 이유로 다섯 번째 해직을 당했다. 1612년 12월 일본의 정세를 조사하는 왜정 진주사(倭情陳奏使)가 된 허균은 바로 다음 날 역모 혐의가 있다는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해직되었다.
이처럼 여러 번의 해직을 낳은 허균의 관직 생활은 평소 서얼 차별 같은 신분 제도의 모순에 불만을 품은 그의 자유 분방한 행동의 결과이기도 하다. 그러나 허균이 방탕한 생활로 불만을 표현했던 것만은 아니다. 서출에게도 관직 임용의 길을 열어 달라는 상소를 제출해 조정의 미움을 사기도 했으며, 자신의 뜻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여섯 명의 서출 출신들과 강원도 산 속으로 들어가 죽림 칠현을 본떠 강변 칠우(江邊七友)라 자처하기도 했다.
그의 일곱 번째 해직은 역모 혐의로 인한 것이었는데 일을 함께 꾸민 자들이 입을 다물어 처벌은 면했으나, 전라도 태인에서 거의 감금과 같은 격리 생활을 했다.
1613년 마지막으로 복직된 허균은 전과 달리 트집 잡힐 일을 피하면서 현실적인 처세를 하는 한편 남몰래 혁명을 준비해 갔다. 1617년 12월 정책 입안의 총책임자인 좌참찬 자리까지 오르며 왕의 신임을 받던 허균은 자신이 1612년 역모에 관련되었다는 사실이 누설되자 거사를 앞당기기로 했다. 무력으로 왕궁을 점거해 권좌에 있던 양반 귀족들을 몰살시킨다는 계획 아래, 민심을 동요시키기 위해 밤에 남산에 올라가 “외적이 침입했으니 서울을 버리고 피난 가라”고 외치기도 했다. 그러나 불심 검문에 걸린 부하 현응민이 고문에 못 이겨 궐기 계획을 자백하는 바람에 허균 또한 체포당했다.
1618년 8월 광해군이 직접 인정전에 나아가 허균 일당을 심문했다. 그러나 허균의 차례가 되자 그의 입에서 당파 싸움 과정의 음모와 비리가 터져 나올 것을 두려워한 대신들이 왕을 만류했다. 왕이 “사형을 속히 해야 마땅하겠지만 물어야 할 것을 물어 본 뒤에 사형을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라고 했으나, 대신들은 “도당들이 모두 승복했으니 달리 물어 볼 만한 것이 없습니다”며 만류했다. 왕이 거듭 “오늘 사형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심문한 뒤에 사형하고자 하는 것이다”고 말했으나 대신들의 만류는 거세었다. 이 날의 일을 다룬 『조선 왕조 실록』은 “왕이 끝내 군신들의 협박을 받고 어쩔 수 없이 따랐다”고 기록하고 있다.
왕이 몸소 국문하는 과정을 목격한 사관은 광해군 10년(1618) 8월 24일의 「광해군 일기」에 이렇게 밝히고 있다.
이 때에 이이첨과 한찬남의 무리들은 허균이 사실대로 말하면 그들의 전후 흉모가 여지없이 드러나 다 같이 사형을 받게 될까 두려워했다. 그래서 자기들의 심복을 시켜 몰래 허균에게 말하게 하기를 “잠깐만 참고 지내면 나중에는 반드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고 하고, 또 허균의 딸이 뽑혀서 후궁으로 들어갈 참이므로 다른 근심이 없으리라는 것을 보장한다면서 온갖 수단으로 사주하고 회유했다. 그러나 그 계책은 실로 허균을 빨리 사형에 처해 입을 없애려는 것이었다.
왕이 몸소 국문할 때 왕이 정상을 캐물으려고 하자 이이첨의 무리들은 허둥지둥 어쩔 줄을 몰라 하면서 그 당류들과 더불어 왕 앞에서 정상을 막고 은폐하며 갖은 말로 협박하고 논쟁해서 왕이 다시 캐묻지 못하게 했다. 왕이 마음대로 할 수 없어서 그들의 청을 따라 주자 이이첨의 무리가 서둘러 허균을 끌고 나가게 했다. 허균은 나오라는 재촉을 받고서 비로소 깨닫고 크게 소리치기를 “하고 싶은 말이 있다” 했으나, 국청(역적 같은 중한 죄인을 신문하기 위해 임시로 설치한 곳)의 상하가 못 들은 척하니 왕도 어찌할 수 없어서 그들이 하는 대로 맡겨 둘 따름이었다.
광해군 4년(1612) 11월 5일 왕은 교하(경기도 파주의 금촌역 부근)로 도읍을 옮기는 일에 대해 2품 이상의 관리들에게 논의하게 했다. 그리고 이듬해 1월 3일 왕은 비밀리에 비변사에 명령해 교하 지역을 살피고 형세를 그려 오게 했다.
예로부터 왕들은 반드시 성읍을 따로 건설해 예기치 않은 일을 대비했으니, 도읍 옮기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교하는 강화를 앞에 마주하고 있고 형세가 아주 기이하다. 독성 산성의 예에 따라 성을 쌓고 궁을 짓고는 때때로 순행하고 싶다. 대신과 해조 당상은 헌관·언관·지관과 함께 날을 택해 가서 살피고 형세를 그려 오라.
광해군이 이처럼 서울을 교하현으로 옮길 생각을 가진 것은 지관 이의신의 건의에 따른 것이기도 했다. 한편 이 때 임진 왜란으로 불에 탄 창덕궁이 재건되어 그 곳으로 거처를 옮겨야 했다. 그러나 연산군의 변란을 꺼림칙하게 여겼던 광해군은 이 일을 차일 피일 미루고 있던 터였다. 뿐만 아니라 임진 왜란 이후 이씨 왕조의 기운이 쇠했으며 역성 왕조가 나타날 것이라는 풍문도 퍼져 있었다.
그 밖에도 광해군이 교하로 천도할 것을 생각한 것은 실리적인 판단에 따른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곧 교하 지역은 임진강을 끼고 있고 주위에 너른 평야가 있어 물과 식량 조달이 쉬우며, 무엇보다도 서울보다 외침에 대비하기 쉽다는 것이다.
그러나 광해군의 시도는 관리들이 모두 강력히 반대해 무산되었다. 그릇된 제안을 올린 이의신을 잡아 가두고 처벌하라는 상소도 빗발쳤다. 광해군 5년(1613) 2월 23일의 「광해군 일기」를 보자.
이의신은 하찮은 일개 기술관일 뿐이므로 그 요사스럽고 망령된 것은 변론할 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이른바 왕조의 기운이 이미 다했다는 말은 과연 신하로서 감히 할 수 있는 말입니까? 왕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기가 따르는 것인데, 이미 다했다고 말한다면 이는 의신이 임금이 있는 줄 알지 못하고 종묘 사직이 있는 줄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생각건대, 우리 조정이 나라를 세운 지 지금 2백 년이 되었습니다. 태평한 정치가 예나 지금이나 뛰어났습니다. 중간에 불행한 운수를 만났지만 다시금 왕조의 기운을 떨쳤으니 아름다운 기운이 여전히 왕성하다는 것을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괴이한 의견으로 감히 요사스러운 설을 일으켜, 위로는 임금의 귀를 기만하고 아래로는 뭇사람의 마음을 당혹시킨 바람에, 나라 안팎이 놀라 기운이 심상치 않아 하루도 보존하지 못할 듯합니다. 그러므로 의신의 살을 만 갈래로 찢어도 그 악함을 징계하기에 부족합니다. 그런데도 성상께서는 죄를 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설을 믿으시고, 심지어 가 살피라는 명까지 내리셨습니다. 무릇 교하는 일개 작은 현인데다 포구에 치우쳐 있어 성을 쌓고 부서를 만들기에는 결코 좋은 곳이 아닙니다. 이것은 이웃 나라에 들리게 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의신의 죄를 왕법으로 용납하기 어려우니, 법률에 따라 죄를 내리시고 가 살피라는 명을 빨리 취소하소서.
왕은 “나라를 다스리는 데 어찌 멀리 내다보는 계획이 없는가”며 탄식했다. 그러나 이구 동성으로 반대하는 여론을 무시할 순 없었다.
교하로 도읍지를 옮기려 했던 광해군의 발상은 몇백 년이 지난 오늘날 다시 주목받고 있다. 적지 않은 전문가들이 통일 한국의 새로운 수도를 바로 이 지역으로 정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담배의 원산지는 남아메리카 중앙의 고원 지대다. 1558년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가 남아메리카로부터 종자를 들여와 재배해 유럽으로 전파되었다. 『조선 왕조 실록』에 따르면 우리 나라에 담배가 들어온 것은 일본을 거쳐서였으며 1616년으로 기록되어 있다. 인조 16년(1639) 8월 4일의 「인조 실록」을 보자.
우리 나라 사람이 몰래 담배를 중국 심양에 들여보냈다가 청나라 장수에게 발각되어 크게 힐책을 당했다. 담배는 일본에서 생산되는 풀인데, 그 잎이 큰 것은 7∼8촌(寸)쯤 된다. 가늘게 썰어 대나무 통에 담거나 혹은 은이나 주석으로 통을 만들어 담아서 불을 붙여 빨아들이는데, 맛은 쓰고 맵다. 가래를 치료하고 소화를 시킨다고 하는데, 오래 피우면 가끔 간의 기운을 손상시켜 눈을 어둡게 한다.
담배는 병진(1616)·정사(1617)년부터 바다를 건너 들어왔다. 피우는 사람이 있긴 해도 많지 않았는데, 신유(1621)·임술(1622)년부터는 피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하여 손님을 대할 때 차와 술을 담배로 대신하기 때문에 연다(煙茶)라고도 하고 또는 연주(煙酒)라고도 했다. 심지어는 종자를 받아서 서로 교역까지 했다. 담배를 오래 피운 사람이 백해 무익한 것을 알고 끊으려고 해도 끝내 끊지 못하니, 세상에서 요망한 풀이라고 일컬었다. 담배가 심양으로 들어가자 심양 사람들 또한 아주 좋아했는데, 청나라에서는 토산물이 아니라서 재물을 소모시킨다고 해 명령을 내려 엄금했다고 한다.
담배가 원산지 남아메리카에서 유럽으로 건너간 지 60년만에 일본을 거쳐 조선으로 전해졌으며, 들어온 지 5년만에 대중적으로 확산되었다니 실로 놀라운 위력이 아닐 수 없다. 4백 년 전의 국제 교통 수준을 감안할 때 역사 이래 이처럼 빠른 속도로 전파된 물품도 아마 없을 것이다.
광해군 15년(1623) 2월 15일 동래 왜관에서 화재가 발생해 집 80칸을 모두 태웠는데 이를 기록한 「광해군 일기」에서 “왜인들이 담배를 즐겨 피우므로 떨어진 담뱃불로 불이 난 듯하다”고 말하고 있다. 이처럼 담배가 일본에서 조선으로 상륙하는 데는 별다른 장애가 없었다.
그러나 담배가 조선을 거쳐 중국으로 들어가는 데는 많은 난관이 있었다. 인조 17년(1640) 3월 22일에는 중국에 사신으로 간 윤휘가 담배를 몰래 숨겨 갖고 들어가다가 적발되어 파직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또 중국에서 담배 들여오는 것을 엄금하자 “이익을 탐해 목숨을 걸고 온갖 방법으로 숨겨 가지고 가서 나라를 욕되게 하는 사람”이 늘어났다. 그리하여 1641년에는 담배를 밀반출하는 사람은 1근 이상일 때는 참수하고, 1근 미만일 때는 의주에 가두고, 경중에 따라 죄를 주는 율법이 시행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괴력의 담배 앞에 난공 불락이란 있을 수 없다. 1636년 병자 호란을 일으켜 조선을 침략한 청나라 군사들은 조선에 와서 담배를 배웠다. 처음에는 군영에서 담배를 금지시켰으나 나중에는 철회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중국에선 여전히 담배를 금지했기 때문에 중국으로 가는 길목인 조선의 북서 지역에선 곡물 농사 대신 담배 농사를 짓는 면적이 차츰 늘어갔다. 중국에 담배를 가르치고 난 뒤 담배를 팔아 먹는 셈이었다.
조선 안에서도 담배로 생기는 문제가 차츰 심각해졌다. 기름진 토지마다 이익이 높은 담배를 심는 따위의 폐단이 커져 갔고, 어른·아이 할 것 없이 이 신기한 기호품에 흠뻑 빠져들었다. 숙종 3년(1677) 12월 4일에는 이조 판서 민점의 사위에게 담배 한 짐을 주고 감찰(사헌부 정6품 벼슬)에 임명되었다가 그 사실이 드러나 파면되는 사건도 있었다.
조선에 담배가 전해져 급속히 퍼진 17세기 초반은 임진 왜란과 병자 호란이라는 두 차례의 전쟁으로 사회가 아주 혼란할 때였다. 조정이 붕당의 이권 다툼 장소로 변하고 관직 매매가 성행했으며, 조세 포탈이 극심하고 살인죄를 저질러도 세도가 있으면 처벌받지 않는 따위로 혼란 그 자체였다. 인조 6년(1629) 8월 19일의 「인조 실록」에 실린 선비 이오의 상소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적(청나라 군대)이 물러간 뒤 1년 동안 위나 아래나 안일하게만 보내고 직위가 높고 낮음을 가릴 것 없이 관원들이 그저 유유 자적하며 세월이나 보내는 형편입니다. 신하들이 모여도 우스갯소리나 하며 담배만 피울 뿐이고, 진영에 있는 장수들도 기생이나 끼고 술타령을 할 따름입니다. 혹시라도 저 오랑캐들이 마음을 고쳐먹지 않고 다시 우리 나라에 군사 행동을 해 온다면, 무슨 병력으로 지킬 것이며 어떤 계책으로 방어할 것입니까. 통탄할 일입니다.
지금 백성의 원망은 극에 이르렀습니다. 호패법 시행이 거론된 뒤로부터 지금까지 못살게 구니 백성이 고달프고, 탐관 오리가 백성에게 뜯어 가는 것만을 일삼으니 백성이 고달프고, 공안(공물 내역을 적은 장부)이 정당하지 않아 조세를 무겁게 매기니 백성이 병이 들고, 내사(內司)에서 함부로 걷어들이는 폐단이 날로 심해져 백성이 병들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권세 있는 사람들의 침탈은 옛날과 다름없고 여러 궁에서 끼치는 폐는 전보다도 배나 심하니, 오늘날 백성들의 원망이 어찌 많지 않겠습니까.
과거 전매청의 발표에 따르면, 전두환 정권의 말기 사회적 혼란이 극심했던 1987년의 국내 담배 소비량은 평년을 훨씬 웃도는 수치를 기록했다. 사회적 스트레스와 담배 소비량이 정비례하는 것이다. 이오의 상소문이 말해 주고 있는 것처럼 17세기 초반의 조선은 민초들의 고통과 울분이 넘쳐나던 시기였으며, 바로 이 무렵 담배가 조선에 상륙했던 것이다.
흰 돌로 지은 미국 대통령궁을 화이트 하우스, 곧 백악관이라 부르는 것처럼, 청와대는 문자 그대로 푸른 기와로 지붕을 씌웠다고 해서 생겨난 말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청기와로 지붕을 덮었을까? 경복궁·창덕궁 같이 우리가 보는 많은 왕궁들도 검정 기와를 쓰고 있지 않은가? 이유는 단 한 가지다. 청기와가 검정 기와보다 더 고급이고 비싸기 때문이다. 세종 15년(1433) 7월 12일 왕은 말한다.
근정전 추녀 머리가 비 때문에 무너졌으니 마땅히 고쳐 덮게 해야겠는데, 청기와를 구워 만들자면 그 비용이 아주 많으므로 아련와를 구워서 덮을까 한다. 그런데 우리 나라 사람들은 모든 일에 빨리 하고자 해 정밀하게 하지 못하니, 어떻게 하면 정밀하고 좋게 구워서 비가 새어 무너질 염려가 없게 하겠는가.
세종 대왕도 비싸서 함부로 쓰지 못한 청기와였던 것이다. 문종이 절을 지으면서 청기와를 사용하다가 신하들의 반대로 포기한 일도 같은 사정에 따른 것이다. 정지하가 문종 앞에서 한 말을 들어 보자.
청기와를 구워서 만드는 데 재력이 너무 많이 들므로, 우리 나라에서는 다만 근정전과 사정전에만 청기와를 덮었을 뿐이고, 더구나 문소전과 종묘에도 덮지 못했는데, 어찌 절간에 이를 덮겠습니까?
그러나 이처럼 조선 초기의 절제하는 풍습은 차츰 무너져 갔다. 1504년 11월 연산군은 이렇게 말한다.
인정전과 선정전은 모두 청기와로 이어야 한다. 사찰도 청기와로 이은 것이 많은데, 하물며 왕의 정전이랴. 인양전과 대비 이어소를 한꺼번에 지을 것이니, 빨리 청기와로 다 만들어 이도록 하라. 또 단청을 칠할 때는 마땅히 금을 쓸 것이니, 칠하는 데 쓰일 금 10여 근을 미리 준비하라.
연산군다운 지시였다. 그러나 청기와에 관한 한 연산군보다 한 수 위인 왕이 있었으니 바로 광해군이다. 1618년 1월 8일의 「광해군 일기」에 실린 대화를 들어 보자.
광해군 : 중국에 사신으로 가는 통역관 방의남이 청기와와 황기와 굽는 방법을 배워 왔다고 하니, 방의남에게 자세히 물어서 만들되, 사 온 두 가지 색을 넣도록 하고, 사 온 염초도 속히 들여와 사용하라.
영선 도감 : 방의남에게 목면 5동을 주었는데, 염초 1,500근을 가지고 와서 바쳤습니다. 전에 다른 역관이 사 온 값과 비교하면 3배나 되는 양입니다.
광해군 : 알았다. 그 염초를 가지고 빨리 청기와를 굽도록 하라. 또 방의남이 사 온 양이 다른 역관이 사 온 것의 세 배나 된다 하니, 상을 주도록 하라. 그리고 천추사와 성절사의 행차 때에 미리 경사(중국의 수도)로 가서 황기와 굽는 방법을 자세히 배워 오게 하라.
이 대화를 기록한 사관은 한심하다는 듯 논평한다.
황기와로 대궐 지붕을 덮는 것은 천자의 제도다. 황기와는 천자가 정전의 지붕을 덮을 때 쓰는 기와로, 왕·후 이하는 분수에 지나치게 사용하지 못한다고 한다. 그런데도 왕의 사치스러운 마음이 끝이 없어 청기와를 황기와로 바꾸려고까지 해 중국에 사신으로 가는 역관에게 굽는 방법을 배워 오게 했다. 또 장인에게 많은 돈을 가지고 중국에 가서 황기와 굽는 방법을 배워 오게 했다. 그러면서도 스스로 분수에 지나친 죄에 빠지는 줄을 모르고 하늘을 두려워하지도 않았으니, 어찌 화를 면할 수 있겠는가.